길을 찾아 떠나는 여행
< 번역문 >
내가 풍악산에 유람 갔을 때이다. 하루는 혼자 깊은 골짜기로 몇 리쯤 걸어 들어가다가 작은 암자 하나를 만났는데, 가사를 입은 노승이 반듯하게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었다. 내가 말했다.
“불가의 묘처는 유가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왜 굳이 유가를 버리고 불가에서 찾으십니까?”
“유가에도 마음이 부처라는 말이 있습니까?”
“맹자가 성선을 논할 때 반드시 요순을 말씀하셨지요. 이것이 ‘마음이 부처’라는 말과 무어 다르겠소. 다만 우리 유가의 이치가 현실적일 뿐이오.”
노승이 수긍하지 않고 한참 있다가 말하였다.
“비색비공(非色非空)은 무슨 말이오?”
“이 또한 지나간 경계입니다. ‘솔개는 날아서 하늘에 이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뛴다.’라는 시가 있습니다. 이것은 색입니까. 공입니까?”
“비색비공은 진여(眞如)의 본체요. 어찌 이런 시에 비하겠소.”
내가 웃으며 말하였다. “말이 있으면 경계가 있거늘 어찌 본체라 하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유가의 묘처는 말로 전할 수 없고, 부처의 도는 문자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인가요.”
노승이 깜짝 놀라서 나의 손을 잡으며 말하였다.
“당신은 범속한 선비가 아니군요. 나를 위하여 시를 지어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뛴다는 뜻을 풀어주시오.”
< 원문 >
余之游楓嶽也 一日獨步深洞中 數里許得一小菴 有老僧被袈裟正坐 余曰佛家妙處 不出吾儒 何必棄儒求釋乎 僧曰儒家亦有卽心卽佛之語乎 余曰孟子道性善言必稱堯舜 何異於卽心卽佛 但吾儒見得實 僧不肯良久乃曰非色非空何等語也 余曰 此亦前境也 余乃曰鳶飛戾天魚躍于淵 此則色耶空耶 僧曰非色非空 是眞如體也 豈此詩之足比 余笑曰旣有言說便是境界 何謂體也 若然則儒家玅處 不可言傳 而佛氏之道 不在文字外也 僧愕然執我手曰 子非俗儒也 爲我賦詩 以釋鳶魚之句
- 이이(李珥, 1536~1584), 『율곡집(栗谷集)』권1 「풍악증소암노승(楓嶽贈小菴老僧)」
무인우주탐사선 보이저 1호가 태양계를 벗어나기 직전 찍은 지구의 모습, 검은 허공에 박힌 작은 보석같은 이 사진을 보고 칼 세이건은 영감을 받아 <창백한 푸른 점>이란 책을 썼다. 그는 보이저 1호의 시점에서 지구를 보며 이 창백한 작은 점의 일부를 차지하려 인류가 저지른 무수한 야만적 폭력, 증오와 오해를 반성했다. 그리고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더욱 뜨겁게 사랑해야 하는 현실의 소중함을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자신이 발로 굳건히 딛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길을 잃는다. 눈으로는 눈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제 자리에 붙박여서는 자신의 길을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번쯤은 나를 돌아보기 위해서든 잃어버린 길을 찾기 위해서든 아주 먼 이방으로 여행을 가는 것도 좋다. 저 보이저 1호처럼 멀면 멀수록 더욱 좋다.
붕새의 등을 타고 구만리 창공으로 날아간 장자도 마찬가지다. 아득히 높은 하늘에서 그는 오히려 이 땅의 모순을 이 땅의 부조리를 반성한다. 유가는 노장을 허무하고 멀다는 뜻에서 허원(虛遠)하다고 늘 비판했는데, 장자나 칼 세이건은 그 먼 빈 공간에서 지금 이 자리를 반성하고 자신 앞에 놓인 현실을 새삼 각성했다. 허(虛)가 실(實)이 되는 순간이다.
율곡은 16세 되던 신해년에 어머니 신사임당을 여의었다. 사임당은 율곡에게 어머니였고 스승이었고 어쩌면 세상 전부였다. 깊은 슬픔에 잠긴 율곡은 길을 잃었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한동안 불교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리고 19세 되던 해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하필 금강산으로 간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율곡이 이 세상에서 가장 먼 곳으로 가고 싶었다고 생각한다. 금강산은 지리적 거리로만 보면 꼭 대단히 먼 곳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금강산은 당시 율곡이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이었으리라. 유가의 세상이 아닌 속인이 사는 세상이 아닌, 불교의 세계요 신선의 세계이다. 방외의 금강 세계, 말 그대로 이 세상에서 갈 수 있는 지상의 가장 먼 곳이다.
금강산 중에서도 가장 깊은 골짝에서 율곡은 노승을 만났다. 대화는 유가의 논리로 노승을 승복시키는 모양새다. 소개 글에는 인용되지 않았지만, 이 글의 말미에 율곡의 시를 받은 노승이 며칠 뒤 암자를 떠났다는 대목이 있다. 별다른 언급은 없지만 설득당한 노승이 불가의 가르침을 버리고 하산한 듯한 분위기이다. 열아홉의 선비가 노승을 설득시켜 하산하게 하였으니, 유가의 대승인가?
율곡은 유가의 견득이 현실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작 상처의 치유에 쓴 처방은 요순의 성선(性善)이 아니라 불가의 심즉불(心卽佛)이었을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성선과 심즉불을 연결하여 이해한 것은 아픔이 아물고 난 뒤의 일이다. 불가의 약으로 치유 받고 난 뒤에야 비로소 유자로서의 길을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인가. ‘지나갔다’는 말도 노승을 향해 ‘이미 놓쳤소. 죽은 진실이오.’라고 지적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길에 대한 새삼스런 자각으로 읽힌다.
솔개와 물고기도 마찬가지이다. 뜰 앞의 잣나무와 같은 저 무수한 선어(禪語)의 메타포를 두 사람이 몰랐을 리 없다. 그렇다면 ‘불가의 진리는 문자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인가’라는 말도 불교의 논리로 불교의 논리를 반격한 것이라기보다 ‘문자야 어차피 허울이고 중요한 것은 눈앞에 펼쳐진 진짜 세상, 그것이 내가 가야 할 길’이라는 말로 이해해도 된다.
한 편의 소설같은 이 글을 나는 자문자답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다. 율곡은 지상에서 갈 수 있는 가장 먼 세계로 여행을 간 그날, 그곳에서도 가장 깊은 골짝 어느메에서 잃어버린 자신과 자신의 길을 찾았다. 끝내 길을 찾은 건 암자를 버리고 하산한 노승이 아니라 아물지 않을 것 같던 아픔을 치유하고 방황을 끝낸 자신이었다. 불가의 세계 한복판에서 유자로서 제 갈 길을 찾은 것이다.
금강산이 아니어도 좋다. 우주 끝이 아니어도 좋다. 자신이 떠날 수 있는 가장 먼 여행을 떠나보자. 무어 멀리 갈 것 있나. 내 마음 한 자락만 여행하더라도 붕새보다 훨씬 큰 날개의 새가 필요할지 모른다. 금강산보다 훨씬 다채로운 풍경이 펼쳐질지 모른다.
글쓴이 : 이규필
경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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