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때가 있는 법
모든 생물의 생장은 다 때가 있다.
앞서 빨리 된다고 어찌 기뻐하며 뒤져 더디 된들 어찌 원망하랴.
凡物早晩 各有其時 其先而速也奚喜焉 其後而遲也奚怨焉
범물조만 각유기시 기선이속야해희언 기후이지야해원언
- 하수일(河受一, 1553〜1612), 『송정집(松亭集)』3권 「초당삼경설(草堂三逕說)」
하수일의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태이(太易), 호는 송정(松亭)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영산 현감(靈山縣監), 호조 정랑(戶曹正郎) 등을 역임하였지만 크게 현달하지는 못하였다. 문장은 의리(義理)에 근거하여 전아(典雅)하고 조리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인용문의 출처는 「초당삼경설」이다. 음력 2월에 초당을 지은 하수일은 국화와 해바라기를 심었다. 상추는 그보다 늦은 3월 초에 심었는데, 채 20일이 되기도 전에 싹이 났고 4월에는 밥상에 올랐으며, 6월이 되자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혔다. 상추보다 일찍 심은 해바라기는 6월이 되어서야 꽃이 피고 7월에는 다 떨어졌다. 그때까지도 국화는 울창하게 푸를 뿐 꽃이 피려는 조짐이 없었다. 9월, 서리가 내리자 비로소 황금빛 노란 국화가 피어 그 향기가 코를 찔렀다.
하수일은 이 모습을 사람의 관직 생활과 비교하였다. 늦게 관직에 나왔지만 먼저 현달한 사람은 상추와 같고 일찍 관직에 진출했지만 늦게 현달한 사람은 국화와 같다는 것이다. 이도 저도 아니면? 당연히 해바라기. 그렇다면 어느 것이 좋은가? 상추처럼 빠른 것도 좋지만 국화처럼 더뎌도 나쁘지 않으니, 먼저 현달했다 기뻐할 것도, 늦었다 원망할 것도 없다고 하수일은 말한다. 왜? 다 때가 있으므로.
“초년의 절조를 지키기는 쉽지만 만년의 절조를 지키기는 어렵다.[保初節易, 保晩節難.]”라는 옛사람의 말을 인용하며 하수일은 “차라리 9월의 국화가 될지언정 6월의 상추는 되지 않겠다.[寧爲九月菊, 不爲六月苣也.]” 다짐한다. 과거에 급제했지만 크게 현달하지 못했던 그의 삶을 감안할 때 이 말에서 고뇌도 느껴진다. 만년에라도 현달한 지위에 오르기를 희망한 것은 아니겠지만 자신의 학문과 경륜을 펼쳐보고 싶은 바람, 그러나 바람과 다른 현실 앞에 어찌 고뇌가 없었으랴. 그런 고뇌를 떨치고 만절(晩節)을 지키기 위해 그는 계속해서 이런 다짐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상추나 국화나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까지 최선을 다했다. 서리를 견디는 국화만 대단한가? 물이 많으면 문드러지기 쉽고 부족하면 말라버리기 십상인데, 여린 몸으로 비와 햇살과 바람과 해충을 견디는 상추도 대단하다. 우리가 느낄 수 없지만 둘 다 환경과 맞서 싸우며 마지막까지 매 순간 치열하게 몸부림쳤을 것이다. 해바라기 역시.
세 식물의 생장이 다르듯 우리 삶의 모습도 각양각색이다. 성공의 기준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그것과 관계없이 소중하지 않은 삶은 없다. 그러나 매 순간 성실하지 않으면 소중한 삶을 의미 있게 가꿀 수 없다. 치열한 몸부림 없이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다 때가 있다지만 때를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기상이변에 뽑히고 꺾일 수 있듯이. 그렇다면 우리가 닮을 것은 셋 가운데 어느 하나가 아니라 그것들의 치열한 몸부림이 아닐까? 그들처럼 매 순간 성실하다면 만절을 잃을 염려도 없을 것이고, 때를 만나지 못해도 후회가 적지 않을까? 오늘 하루 또 열심히 살아보자! 때가 오면 다행이고.
글쓴이 : 정만호
충남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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