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고전의 향기

나의 이름은

백광욱 2021. 2. 3. 00:03

 

나의 이름은

 

< 번역문 >

자정이 말하였다. “다릅니다. 형. 공자께서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묻고 삼가 생각하고 밝게 분변하고 독실하게 행해야 한다. 남이 한 번, 열 번 해서 능하다면 나는 백 번, 천 번 한다.’ 말씀하시고는, 또 ‘과연 이 도에 능하게 된다면 어리석더라도 반드시 밝아지며 유약하더라도 반드시 굳세게 된다.’는 말씀으로 간절한 뜻을 극진히 하셨습니다. 이는 학문을 하는 전체이고 덕에 들어가는 큰 방법입니다. 그런데 형은 이 ‘과능(果能)’의 ‘과’가 있는 줄은 모르고, ‘과’의 한 가지 일로만 말한 것과 성인이 달가워하지 않은 ‘과’를 취하여 비긴 것은 어째서입니까. 내가 거처에 이름을 붙인 뜻은 여기서 나왔는데 또한 내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간재 전 선생이 명명한 것입니다. 형이 한번 생각해보면 필시 쓸 말을 얻을 것입니다.” 내가 마침내 깨닫고 말하였다. “내 알겠다. 대저 성인이 성인인 이유는 밝고 굳세기 때문이고 범인이 범인인 이유는 어리석고 유약하기 때문이니, 어리석고 유약함을 변화시켜 밝고 굳세게 할 수 있다면 범인 또한 성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변화시키고자 하더라도, 배우고 묻는 등의 공부와 백 번, 천 번 하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안 되고, 배우고 묻는 등의 공부와 백 번, 천 번 하는 노력을 하더라도 이를 하는 데 과연 능하지 않다면 또한 안 된다. ‘과’라는 한 글자는 천 마리 소보다 크고 열 마리 범보다 용맹하니, 바로 범인을 단련하여 성인으로 만드는 성패를 가름하는 기관이다.”

 

< 원문 >

子貞曰, 異哉兄也. 孔子曰, 博學審問愼思明辨篤行. 人一己百, 人十己千. 又以果能此道, 雖愚必明, 雖柔必剛, 致其丁寧之意, 此爲學之全體, 入德之大方. 兄不知有果能之果, 乃取果之只以一事言者及聖人所不屑之果而擬之, 何也? 吾之扁菴, 蓋出於此, 而亦非吾之所私, 艮齋田先生之所命也. 兄試思之, 必得其說. 余乃憬然而悟曰, 余知之矣. 夫聖人之所以爲聖人者, 以其明且剛也, 凡人之所以爲凡人者, 以其愚且柔也. 能變愚柔而爲明剛, 則凡人亦可以爲聖人矣, 雖欲變之, 而不用學問百千之功, 未可也, 雖用學問百千之功, 而不果能用之, 亦未可也. 果之一字, 大於千牛, 勇於十虎, 乃鍛凡鑄聖之成敗機關也.

 

-김택술(金澤述, 1884~1954),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21권, 「과암기(果菴記)」

 

< 해설 >

위는 김택술이 외제(外弟)인 자정(子貞)에게 지어준 글이다.

 

자정은 '과암'이라는 이름을 상정해두고 그 실질을 써달라고 청한다. 작자는 생각해본다. 경전(經傳) 등 여러 옛 문헌에 두루 쓰였던 그 글자에서 자정이 어떤 뜻을 취했을까. 그에는 자정의 바람과 지향이 담겨 있을 것이다.

 

『주역(周易)』에서 말한 석과(碩果)의 '과'처럼 음기로 가득한 시대에 양기 하나를 보전하려 하는가. 부모님에게 아름다운 이름을 끼치기 위해 선행을 하는 데 '과'하려 하는가. 정사에 종사하기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던 자로(子路)처럼 '과'할 것인가. 현재의 삶을 버리고 '과'하게 은둔할 것인가. 스스로 대인(大人)이 되지 못할 기질임을 인정하고 선비라는 이름을 잃지 않을 삶을 '과'하게 선택할 것인가. 이는 분명 '과'의 의미 유추를 위해 작자가 자정에게 건네는 가벼운 말로 보이지만, 존재에게 이름이 갖는 무게를 생각해본다면 상대방에게 향후 삶의 바람과 지향을 묻는 묵직한 질문으로 읽히기도 한다.

 

이에 대해 자정은 위처럼 답한다. 『중용』 오학(五學)에 능할 때까지 다른 사람보다 백 배, 천 배의 노력을 기울여서라도 밝고 굳센 사람이 되겠노라고 말이다. 그 말을 들은 작자는 자정이 제시한 의미에 자신의 당초 생각 중 일부를 덧붙여 '과'의 의미를 확장한다. 『중용』에서 제시한 경지를 이룬다면 음기로 가득한 세상에서 양기 하나를 보전할 수 있고 부모님을 생각해서 선을 행할 수 있고 과했던 자로처럼 정사에 종사함에 뜻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작자가 자로의 '과'한 면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본받을 덕목으로 상정한 점은 의문으로 남는다. 공문십철(孔門十哲)의 한 사람에 속하는 제자였으나, 공자는 그가 너무 굳센 데만 치우쳐 제 명에 죽지 못하리라고 예감하지 않았던가. 단 몇 마디 말로 송사를 처결하고 허락을 늦추지 않는다는 평도 기실 용맹과 과단이 갖는 양면성을 지적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당시 일제 치하라는 시대 상황과 일제에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던 작자의 삶의 자취로 유추해보면 수긍되는 점이 있다. 온통 음기로 가득한 난세에서 양기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치세의 덕목만 견지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상황에 따라서는 목숨을 걸고 시대에 항거할 용맹과 과단이 필요하다.

 

또 다른 면으로 보자면 자로의 용맹과 과단을 넘어선 영역에는 밝음의 덕목까지 지닌 성인의 경지가 있기에 보완되는 점이 있다. 작자는 소처럼 크고 범처럼 용맹한 그 길을 자정이 가기를 바랐고 자정은 이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 글의 말미에 자정이 향후 힘쓰는 방법으로 제시한, 시작하지 않는다면 모르겠지만 일단 시작한다면 잘할 때까지 그만두지 않는다는, 『중용』의 다섯 번의 그만두지 않겠다는[五弗措] 가르침을 실천하겠다는 다짐이 그 각오를 뒷받침한다 하겠다.

 

허나 시대가 요구하고 타인이 원한다고 해도 자기 삶의 주인은 자신이므로, 시대와 타인에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현재의 삶을 버리고 은둔하거나,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현실에 순응하며 산다고 해도, 그 누가 비난할 수 있을 것인가. 각자 짊어진 삶의 무게는 다르고 나의 이름은 결국 내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다만 우리의 이 삶은 스스로 늘 깨어 있지 않으면, 사람과 일에 치여, 내가 내 삶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잊게 된다. 삶을 끌어갈지 삶에 끌려갈지를 나의 의지와 노력 여하에 따라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도 결국 희미해지게 된다. 옛 사람들이 이름을 돌아보아 뜻을 생각했던 이유도 이에 있지 않았을까.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최선의 가치를 선택할 수 있다면 가장 좋겠거니와, 그러기 위해서는 그 전에 내가 누구이고 무엇을 바라고 지향하는지 알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 내가 바라고 지향하는 가치에 가까워질 수 있고, 혹시 있을지 모를 실패에도 최소한 타인을 원망하는 일이 없어지리라. 이러한 경우의 원망은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데 불과하고, 이는 나의 이 소중한 삶을 방기한 것이나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그저 아무런 생각 없이 끌려가며 살기에는 단 한 번뿐인 삶이 아깝지 않을까.

 

글쓴이 : 강만문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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