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고전의 향기

시골 선비 신송계(申松溪)

백광욱 2017. 12. 20. 07:04

 

 

 

시골 선비 신송계(申松溪)

번역문

   내가 밀양을 다스린 지 한 해가 되었다. 밀양은 본래 선비가 많다고 일컬어지는데, 늘 왕래하던 이들이 송계(松溪)의 사람됨을 칭송해 마지않았다. 내가 “선생은 어떤 분인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같은 고을에 살며 영달을 구하지 않고 저술을 일삼지 않았으며, 오로지 학문을 자신의 소임으로 여기셨던 분입니다. 말로만 떠드는 걸 비루하게 여겨 독실하게 실천했으며, 고요하고 단정하여 함부로 말하거나 웃지 않으셨습니다. 마음은 충신(忠信)과 성경(誠敬)으로 가득 찼으며, 행실은 온량(溫涼)과 정고(貞固)하셨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지런히 조금도 해이한 법이 없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자는 그른 것을 스스로 그만두었고, 그 말을 들은 자는 더러움을 스스로 제거하였습니다. 그분의 학문 조예가 깊은지 얕은지에 대해서는 저희가 감히 가늠할 바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했다. “진실로 그대의 말과 같다면, 신 선생 학문의 경지는 그걸로 대략 짐작할 수 있겠다. 이런 분이 계신데도 지금껏 모르고 있었으니, 어찌 책심(責沈)의 꾸짖음을 면할 수 있겠는가?”

원문
余守密, 已一週. 密素稱多士, 常與往來者, 吃吃稱松溪之爲人不置. 余曰, “先生何如?” 曰, “居一鄕, 不求聞達, 不事著述, 專以學問爲己任. 鄙口耳而篤踐履, 沈靜端殼, 不妄言笑. 充於內者, 忠信誠敬, 著於外者, 溫涼貞固. 晨興夕惕, 未嘗少懈. 見其容者, 邪僻自止, 聞其言者, 塵垢自除而已. 若其學問所造之淺深, 則固非小子之所能形容也.” 余曰, “誠如子言, 申先生之學之至, 亦可因是而窺其際矣. 有人如是, 而吾至今不相聞知, 其能免責沈之譏乎.”

- 김극일(金克一, 1522~1585), 「송계 신선생 여표비명 병서(松溪申先生閭表碑銘 幷序)」

해설

   나는 1999년도 2학기, 부산대 한문학과에 부임했다. 마흔 살을 넘겼을 때였다. 한창나이였던 만큼, 나를 포함한 학과 교수들 모두 학생 지도에 열성이었다. 교수회의 같은 공식적인 자리만이 아니라 술자리에서도 화제의 중심은 늘 학생이었다. 순수한 학생 사랑의 발로에 더해 일종의 오기, 그래 지방에서도 훌륭한 학생을 키워낼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학과 기금도 차곡차곡 모아 제법 많았다. 용도를 물어보니, 풍광 좋은 장소를 물색하여 학과 전용의 정자를 지어 학생들을 데리고 한문 집중교육의 공간으로 활용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부산에 내려와서 보니, 조금 밖으로 나가보면 골골마다 고가든 정자든 비어있는 게 숱하게 많은데, 굳이 지을 필요가 있느냐?”는 나의 질문에 의욕이 상실되어 버린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젊은 한문학과 학생들이 합숙하며 한문 공부를 하겠다면, 어느 집안인들 빌려주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하여 그날, 학과 기금으로 들어가도 좋은 돈으로 학과 회식을 거하게 치렀던 것 같다. 정말 그러했다. 그때도 그랬듯이, 지금도 고을 곳곳에 비까번쩍한 고가(古家)들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어디 고가뿐인가? 향교든 서원이든 몇몇을 제외하고 나면, 강당 마루에는 쥐똥과 먼지가 뽀얗게 덮여 차마 걸터앉을 수조차 없는 곳이 대부분이다.

 

   게다가 효자라든가 열녀 또는 신도비와 같은 기념비를 보듬고 있는 비각(碑閣)을 보고 있노라면, 초라함은 극에 달한다. 모두 한때는 한 고을의, 한 가문의 어마어마한 성사(盛事)였던 것을 생각하면, 처연한 마음이 들 정도다. 밀양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 고가와 서원뿐만 아니라 비각들도 즐비하다. 그런 밀양의 대표서원 예림서원(禮林書院)을 처음 찾아가본 것은 점필재연구소를 만들던 2006년 가을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점필재 김종직 선생만이 아니라 좌우에 오졸재(迂拙齋) 박한주(朴漢柱) 선생과 송계(松溪) 신계성(申季誠) 선생이 배향되어 있다는 사실도 그때 처음 알았다.

 

   아니,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런 분이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럼에도 나의 무식을 탓하기보다 그런 무명의 선비를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신기해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지만. 게다가 예림서원을 무시로 오가면서도 그 주변에 있던 비각을 무심하게 지나쳤다. 아주 한참 뒤에 알았지만, 서원에 배향되어 있는 송계 신계성 선생이 살던 고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던 밀양 부사 김극일(金克一)이 세운 여표비(閭表碑)였다. 위에서 읽어본 글은 바로 거기에 새겨진 글의 서두 부분이다. 마음은 충신(忠信)과 성경(誠敬)으로 가득차고, 행실은 온량(溫涼)과 정고(貞固)했다며 고을 사람들의 간곡한 소원을 담아 기리고자 했던, 그 분. 하지만 내겐 여전히 어느 시골 선비에 대한 상투적인 찬사로밖에는 다가오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씩 알아갈수록 송계 선생의 모습은 점점 또렷하게 다가왔다. 다른 사람을 좀처럼 허여하지 않기로 유명했다는 남명(南冥) 조식(曺植)조차 「처사신군묘표(處士申君墓表) 」에서 “아, 죽지 못한 자 비록 남아 있긴 하건만, 죽은 자는 자취마저 없구나. 오늘은 자함(子諴, 신계성의 자)이 가고, 내일에는 건중(楗仲, 조식 자신의 자)이 갈 텐데, 구태여 자질구레한 말을 더해서 무엇하리. 홀연히 붓을 내던지고 크게 한번 웃노라.[嗚呼, 不亡者雖存, 其亡者已亡, 今日之子諴, 明日之楗仲, 言尙有枝葉乎, 忽投筆一噱.]”라며 말을 잊지 못하고 슬퍼했다. 그리고는 “우리 무리 가운데 신군이 가장 최고였네.[吾黨有人 申君爲最]”라는 구절로 명(銘)을 시작할 정도로 송계 선생의 자취는 우뚝했던 것이다.

 

   그건 결코 망자를 위한 낯간지러운 칭송만이 아니었다.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1517~1563)은 스승 퇴계에게 “응천(凝川, 밀양)에 처사 신계성이 있는데, 평상이 뚫어지도록 40여 년 동안 학문을 닦아 자득(自得)한 공이 많습니다. 조식이 일찍이 스승으로 일컫고 있다 하니, 조만간 찾아가 그 사람됨을 보고자 합니다.[凝川有申處士季誠,穿牀四十餘年,多有自得之功. 建中嘗稱爲師,早晩一叩,亦欲見其爲人矣.]”는 편지를 드렸을 정도다. 송계 신계성은 남명 조식과 가장 절친한 벗이자 사우(師友)였던 것이다. 그들은 죽은 뒤, 김해 산해정(山海亭)이 있던 자리에 세운 신산서원(新山書院)에 나란히 병향(竝享)되어 있을 정도다.

 

   지금 우리들 대부분은 “남명 친구, 송계”로 기억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송계 친구, 남명”이 더 익숙했을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런 송계의 자취는 초라하게 서 있는 여표비와 소략하기 그지없는 실기(實紀) 한 권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김극일이 책심(責沈)*의 고사를 들어 송계 선생을 모르던 자신을 책망했던 것처럼, 나 또한 깊이 반성한다. 속죄의 마음일까? 중앙의 무대를 활보하던 연암이라든가 다산 같은 조선 후기의 빛나는 거성(巨星)들만 휘황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지금, 후미진 밀양 촌구석에서 쓸쓸하게 퇴락해 가고 있는 「송계 신선생 여표비명」를 보면서 흔적 없이 스러져가고 있을 그 많은 선현(先賢)의 부활을 꿈꿔 보기도 한다. 이윤택 감독의 ‘시골 선비 조남명(曺南冥)’이 2001년도 서울공연예술제에서 연극부문 대상은 물론 연출상ㆍ남자연기상ㆍ음악상까지 휩쓸며, 일약 퇴계와 쌍벽을 이루는 조선 선비의 표상으로 남명이 거듭났던 것처럼.

 

* 책심(責沈) : 남들은 모두 송계 신계성을 아는데 자기만 몰랐다는 자괴감을 표현한 말이다. 책심은 ‘심저량(沈諸梁)을 나무란다.’는 뜻이다. 송(宋)나라 진영중(陳塋中)이 자신의 과루(寡陋)함을 부끄러워하며 지은 글 제목이다.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섭공(葉公) 심저량이 자로(子路)에게 공자에 대해서 물었으나 자로가 대답하지 않았다. 섭공은 당대의 현자(賢者)인데, 노나라에 중니(仲尼)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으니, 자로가 대답하지 않은 것도 당연한 일이다. 내가 29세 때에 범순부(范醇夫)와 대화를 하다가 ‘안자(顔子)처럼 불천불이(不遷不貳)한 사람으로는 백순(伯淳)이 있다.’는 말을 듣고 백순이 누구냐고 물었다. 범공이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정말 정백순(程伯淳)을 모르는가?’라고 하였다. 나는 부끄러워 범공에게 사과를 했다.” 섭공의 물음에 자로가 대답하지 않은 것은 『논어, 술이(述而)』에 나온다. 백순은 정호(程顥)의 자(字)이다.

글쓴이정출헌(鄭出憲)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