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은 일반인들의 우리 고전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높아졌습니다. 연설이나 칼럼 등에 멋진 한문 구절 한두 마디씩 인용하는 사람들도 심심찮게 보입니다. 인문학의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 형성의 결과일 수도 있지만, 역사에서 소재를 취하여 만든 영화, 드라마 등의 잇따른 성공이 우리 고전에 대한 관심을 촉발하는 데 큰 힘을 발휘했다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게다가 요즘은 초등학교 어린이들의 한자 학습 열기도 만만치 않으니-물론 여기에는 우리 부모님들의 지극정성도 큰 몫을 했겠지만- 이렇게 너나 할 것 없이 고전에 나오는 훌륭한 말씀들을 일상 속에서 되새기고 실천한다면 조만간 우리나라가 다시 문화강국으로 세계에 우뚝 서는 모습을 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마냥 흐뭇하고 행복합니다.
그런데 최근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 세상이 갈수록 각박하고 살벌해지는 것만 같아 걱정입니다. 물신숭배(物神崇拜)의 결과로 나타난 개개인의 탐욕과 이기심은 수많은 부정과 불의를 낳았습니다. 오직 공부 공부로만 내몰려 황폐해진 우리 아이들의 인성은 다른 이들의 아픔에 공감하거나 약자의 어려움을 이해할 줄 모르는 괴물을 만들어 냈습니다. 리더가 리더답지 못하고 어른이 어른답지 못한 세상, 부모가 부모답지 못하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한 세상, 겉으로 보이는 것들에만 매달려 휘둘리느라 진정한 내면의 아름다움을 볼 줄도 가꿀 줄도 모르는 황폐하고 가난한 세상이 된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합니다. 무엇 때문에 세상이 이렇게 되었을까요?
인조 11년(1633)에 임금이 전시(殿試)에서 경전(經傳)의 뜻에 대해 물었을 때 고산(孤山)은 아래와 같이 답을 올렸습니다.
…신이 삼가 엎드려 생각하건대, 성현(聖賢)의 글이 무엇이냐 하면 도를 싣는 그릇이요, 성현의 도(道)가 무엇이냐 하면 마음을 전하는 법이니, 글이 지어지기 이전에는 도가 마음속에 들어 있다가, 글이 지어진 뒤에는 마음이 글 속에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언어는 만 가지로 다르고 취지는 각각 차이가 있어도 도는 하나로 관통하고 마음은 그 법이 동일하니, 이 글을 인하여 이 마음을 구하면 글이 도에 들어가는 가르침이 되겠지만, 이 마음을 버리고 이 글을 본다면 글은 고작 보는 사람의 여인숙이 되고 말 것입니다. 참으로 성현의 마음을 얻으면 성현의 글이 내 안에 있어서 천언만어(千言萬語)의 묘용(妙用)이 마음을 벗어나지 않겠지만, 성현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글은 글대로 나는 나대로의 식이 되어서 차근차근 잘 이끌어 주는 성현의 뜻이 오히려 공언(空言)으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요컨대 성현의 글을 읽을 때 그것을 내 마음으로 깨닫고 몸으로 실천하고자 한다면 그것이 나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나침반이 되겠지만, 그런 마음 없이 그저 ‘글은 글이요 나는 나일 뿐’이라는 자세로 스쳐 지나가기만 한다면 경전 수백 권을 읽고 그 속에 나오는 문장을 줄줄 외우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인조 임금에게 아뢴 말씀이지만 오늘날 이 말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근래에 일어나고 있는 인문학 열풍이 그저 한번 반짝하고 지나가는 유행이 아니라 고전의 글귀를 통해 진정으로 자신과 남을 돌아보고 올바른 삶의 자세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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