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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가슴이 아픈' 질병에 대하여

백광욱 2023. 9. 26. 05:03

 

세상에서 '가장 가슴이 아픈' 질병에 대하여

 

9월 21일, 오늘은 ‘치매극복의 날’입니다. ‘치매극복의 날’은 1995년 세계보건기구(WHO)가 국제알츠하이머협회(ADI)와 함께 가족과 사회의 치매환자 간호문제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지정되었습니다.

분명 마주 보며 손잡고 있으나 그는 여기 머물러 있지 않다.
서로에 대한 사랑을 그대로 지닌 채 함께 늙어가기를 간절히 꿈꾸었을
부부를 갈라놓고 비록 잎 떨어진 마른 나무일지라도
끝까지 인생의 버팀목이 되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부모를 알 수 없는 먼 곳으로 데려가 버렸다.
세상에 무슨 이런 병이 다 있단 말인가.

-이성희, 유경 저, <엄마의 공책> 중에서

 

세상의 모든 질병이 다 가슴 아픈 병이겠지만, 치매는 가장 사랑했던 이를 잊어간다는 점에서 가장 가슴 아픈 질병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같은 말의 반복,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는 일의 반복은 초기 치매의 주요 증상입니다. 정해진 시간에 먹어야 하는 약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가스를 제대로 잠갔는지 안 잠갔는지, 선풍기를 껐는지 안 껐는지. 불안하고 자신이 없는데다가 실수를 몇 번 한 적이 있어 비정상적일 만큼 확인을 반복하는 일 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점점 이런 일이 많아지는데도 여전히 나이 탓을 하거나 요즘 너무 바쁘고 생각할 게 많아 뇌에 과부하가 걸려서 그런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서로를 달래주고 있지는 않은지요…?

만약 진단을 통해 치매를 확진 받았다면 흔란과 거부, 부정, 분노, 원망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단념’의 단계로 빨리 들어가야 합니다. 다시 말해 병이 났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제부터라도 병을 제대로 파악해 환자와 함께 앞으로 걸어 나가겠다고 결단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좋았겠지만 이미 병은 시작되었으니, 최대한 서로의 고통을 줄이면서 지금 해야 할 일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죠. 그러려면 무엇보다 먼저 치매를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치매환자들이 몹시 화를 내거나 누군가를 갑자기 공격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일이 있는데, 그 이유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 완전하게 파악하기란 실로 어려운 일입니다. 무언가 싫다는 의사표시일 수도 있고, 자존심이 상했다는 뜻일 수도 있으니까요. 아니면 예전에 실패했거나 괴로웠던 일이 떠올라서, 혹은 아무도 자기에게 관심이 없거나 할 말이 있는데 말을 못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자꾸 하라고 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집에서 환자를 돌보는 경우, 가족을 포함해 기존의 인간관계를 유지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한데요. 자칫 고립되기 쉽고 그러다보면 외로움과 소외감 속에서 돌보는 사람도 치매환자도 병이 깊어질 염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돌봄자가 아무리 잘하고 있고 스트레스를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해도 옆의 가족들은 그의 마음을 헤아려 부담을 줄여주면서 쉴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치매환자 돌봄이 가족 불화와 가족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끝내는 가족 해체를 가져오기도 하는데요. 누구 한 사람의 책임이라기보다는 서로 짐을 나누어지지 않은 모두의 잘못일 것입니다. 치매환자는 ‘병’에 걸렸을 뿐 죄가 없습니다.

환자는 오늘도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머릿속이 순간적으로 텅 비어버리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간다고 해도 존재 자체가 하찮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뇌의 어느 부분이 손상돼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 있는가 하면, 아직 남아 있는 기능이 분명 있습니다.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는 기능을 ‘잔존 기능’이라고 하는데, 치매환자는 이 잔존기능을 사용해서 오늘을 살아갑니다. 따라서 환자가 할 수 있는 것을 도와주는 게 아니라 하지 못하는 것을 도와야 합니다. 할 수 있는 걸 도와주게 되면 할 수 있는 것까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죠.

 

최선을 다해 오늘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는, 살아내고 있는 치매환자. 그 삶의 무게가 결코 만만찮을지라도 버티고 있는 연약한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일 것입니다. 치매는 걸리고 싶어 서 걸리는 병이 아니며, 뇌혈관이나 뇌세포를 가지고 있는 한 누구나 걸릴 수 있는 병이니까요.
그러니 비록 어린아이들 표현대로 생각주머니’가 깨졌다 해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유지되도록 도우며 돌봐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일수 없는 병 앞에서 존재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면서 모두가 최선을 다해 돌봄으로써, 치매 환자가 마지막까지 안심하고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미래가 바로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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