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시욕
< 번역문 >
네가 돈에 목마른 놈이 되었다는 것을 들으니 마음이 매우 언짢다. 농사지을 소를 팔러 보냈다. 너의 작은 성취 덕에 내가 벌써 농사를 쉬게 되었으니, 이것도 어버이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구나. 너는 『지봉유설』에 나오는 홍패(紅牌)를 가지고 진제장(賑濟場)에 가 밥을 빌어먹었다는 자를 보지 못했느냐. 내가 보기에는 백성들의 일이 저 때보다 훨씬 급박한데도 너는 혼자 편안히 여기고 즐거워하여 나를 미치게 만드는구나.
< 원문 >
聞汝作渴錢漢, 心甚不寧. 農牛賣送. 汝小成之效, 已使我釋耕, 亦可謂榮親矣. 汝不見芝峯類說, 負紅牌就乞糧廳得食者乎? 以吾所見民事之急, 急於彼時萬萬, 而人自恬嬉, 令人發狂也.
- 이항로(李恒老, 1792~1868), 『화서집(華西集)』 卷13 「준에게 답한 편지(을미년 9월 23일)[答埈(乙未九月二十三日)]」
이항로는 조선 후기의 유학자로, 본관은 벽진(碧珍), 초명은 광로(光老), 자는 이술(而述), 호는 화서(華西),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양근군(楊根郡 현재의 양평읍 일대)에서 태어나 1808년(순조8)에 반시(泮試)에 합격하였는데, 이때 한 고관이 과거 급제를 조건으로 걸고 자신의 아들과 어울릴 것을 종용하자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과거에 대한 뜻을 접은 채 평생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뒷날 그의 문하에서는 김평묵(金平默, 1819~1891) · 최익현(崔益鉉, 1833~1906) · 유인석(柳麟錫, 1842~1915) 등 구한말 외세(外勢)의 침탈에 항거한 우국지사(憂國之士)들이 배출되었다.
이항로가 마흔네 살이던 1835년(헌종1)에 집안에 경사가 있었다. 그의 장남 이준(李埈, 1812~1853)이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한 것이다. 인용문은 이때 그가 이준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다. 이준은 생원시에 합격하고 귀향을 앞두고 있었는데, 이항로는 이 편지보다 사흘 전에 보낸 편지에서 “네가 돌아왔을 때, 나는 네가 머리에는 먼지투성이 갓을 쓰고 발에는 짚신을 신고 있는 것을 본다면 마음이 편안할 것이다.[汝歸時, 見汝頭着塵冠, 足穿草屨, 吾心卽安矣.]”라며 검소한 차림으로 올 것을 당부하였다. 흉년으로 민생이 좋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준은 이웃들에게 위풍당당한 모습을 과시하고 싶었는지 결국 집의 소를 팔아 화려한 의복을 살 비용을 마련하였다.
편지에서 이항로는 기어이 소를 팔아 의복 비용을 마련한 아들을 나무라고 있다. “네가 소를 팔아버린 덕에 농사를 안 짓고 호강한다. 대단한 효자 나셨네!”라는 투로 비꼰 뒤,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의 『지봉유설(芝峯類說)』의 한 부분을 언급하며 훈계한다. 이는 1594년(선조27) 2월에 59세의 나이로 문과정시(文科庭試)에 합격한 최계옥(崔啓沃, 1536~?)이란 사람의 일화이다. 이때는 임진왜란 중 왜군으로부터 한양을 수복한 지 1년도 되지 않았을 때로, 이보다 넉 달 앞서 환도한 선조(宣祖)와 조선 정부는 서울에만 다섯 곳의 진제장을 설치하고 죽을 배급하는 데 힘쓰고 있었다. 최계옥의 입장에서는 늦은 나이에 한 급제가 더없이 기뻤을 터이지만, 당시의 식량난은 잔치는커녕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는 하릴없이 급제해서 받은 홍패를 손에 들고 어사화를 머리에 꽂은 채로 진제장에 가서 죽을 타 먹었다. 근사한 급제자의 옷차림으로 초라하게 진제장에서 죽을 타 먹는 모습이 한편으로는 우스꽝스럽게 느껴지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당시의 식량난이 심각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항로는 이 일화를 거론하고 아들에게 작금의 상황이 이보다 더한데도 철없이 행동한다며 노여운 기색을 드러내고 있다.
아들의 경솔한 행동을 반어법을 통해 유머러스하게 비꼬고 노골적으로 못마땅한 기분을 드러낸 이 편지는, 한문학 연구자들이 주로 접하게 되는 성리설(性理說)을 토론하거나 안부와 근황을 전하는 편지들과는 조금 다른 맛이 있다. 근엄한 성리학자라고 알려진 인물의 진솔한 감정이 묻어나는, 이른바 ‘사람 냄새’가 느껴지는 편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편지에서 드러나는 이항로와 이준의 갈등 또한 현대의 독자들이 보기에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다. 두 사람의 갈등의 원인은 이준의 ‘과시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준은 이웃들에게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이고자 당시로서는 큰 재산인 소를 팔아 의복을 마련하고자 하였고, 이항로는 당시의 분위기로 볼 때 남들에게 사치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겨 아들이 검소한 차림새로 집에 오도록 당부하였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준처럼 소비를 통해 스스로를 과시하려는 욕망이 있을 것이다. 이 자체는 당연한 일이고, 과하지 않은 이상 비난받을 일도 아니다. 다만 요사이 우리나라에서 이 ‘과시욕’이라는 것이 새삼스레 화두가 되고 있다. 이른바 MZ세대(1981~2012년 출생자)의 소비문화 때문이다. 우리는 한 대에 3억 원을 호가하는 모 고급 외제 승용차가 아시아‧태평양 지역 중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팔렸다거나, 한국인의 1인당 명품 소비액이 세계에서 1위를 차지했다거나 하는 등의 뉴스를 종종 접하곤 한다. 이는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에 따른 구매력의 증대에 원인이 있기도 하지만, 현재를 즐기고 자신을 드러내는 데 돈을 아끼지 않는 MZ세대의 생활방식 때문이기도 하다. 더욱이 이러한 풍조는 SNS(Social Network Service)의 보편화와 맞물려 더욱 증폭된다. SNS는 이런 고가의 재화를 소유한 이들이 자신을 과시할 수 있는 창구가 되기에, 이를 소유하지 못한 이들에게 시기심이나 부러움을 유발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남들에게 과시할 목적으로 고가의 자가용 승용차를 빚을 내어 구매한다든가, SNS에 올릴 사진을 찍기 위해 무리해서 골프나 해외여행을 간다든지 경제력 이상의 소비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심지어 이로 인해 생긴 빚을 감당하지 못해 파산하는 이들도 생겨나고 있다.
물론 이런 고가의 재화나 고비용의 여가 생활을 누리는 사람이 예전이라고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예전에는 이항로가 이준에게 훈계한 것처럼 주변의 눈치를 살피곤 했다. 한 예로, 학교가 끝나면 운전기사가 고급 승용차로 모시러 오는 부잣집의 자제들도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대게 하는 일도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느낄 위화감을 의식하여 과시욕을 절제한 것이다.
우리 사회와 문화는 빠르게 자본주의 체제에 적응해왔다. 소비를 과시하는 문화가 생기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고, 이를 선망하고 동경하게 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앞으로도 이 같은 소비문화의 확산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자본주의 문화의 유입과 만연 속에서 이항로가 이준에게 남긴 훈계는, 과시욕의 절제라는 우리 사회에서 잊혀가는 미덕을 상기시켜준다.
글쓴이 : 임영걸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대동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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