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베껴 쓴 <맹자>책에서 발견한 나
< 번역문 >
책을 햇볕에 쬐어 말리던 날 저녁, 다섯 살에서 열 살까지 갖고 놀던 것들을 모아 둔 상자를 찾아냈다. 모지라진 붓, 부러진 먹, 먼지 쌓인 구슬, 새의 깃털, 등잔 장식, 송곳 자루, 바가지로 만든 배, 싸리나무로 만든 말 따위가 책상 높이만큼이나 나왔다. 때로는 좀벌레 사이에서 기와 조각이 나오기도 했다. 이것들은 모두 이 손으로 가지고 놀던 것들이었다. 서글프지도 않고 기쁘지도 않았지만 갑자기 옛날 사람이 된 듯하였다. 오늘의 성장한 내가 놀랍기도 하고, 옛날이 세월이 지나며 변했음이 느껴지기도 했다. 손바닥만 한 책도 10여 권 있었다. 『대학(大學)』‧『맹자(孟子)』‧『시경(詩經)』‧『이소(離騷)』‧『진한문선(秦漢文選)』‧『두시(杜詩)』‧『당시(唐詩)』‧『공씨보(孔氏譜)』‧『석주오율(石洲五律)』은 내가 손수 비점(批點)을 찍은 것인데, 모두 흩어져 완질(完帙)이 아니었다. 그중 『맹자』는 네 권으로 나누어 엮었는데, 역시 한 권이 빠져 있었다.
< 원 문 >
曬書之夕, 有自五歲至十歲吾遊戱之篋. 凡禿筆‧敗墨‧埋珠‧落羽‧燈之飾‧錐之柄‧瓠舟‧杻馬之屬, 與案齊, 往往瓦礫出蠧魚中, 皆此手之所摩弄也. 非愴非歡, 忽如舊人. 訝今日之長成, 悟昔日之變歷. 卷如掌者什餘, 『大學』‧『孟子』‧『詩』‧『離騷』‧『秦漢文選』‧『杜詩』‧『唐詩』‧『孔氏譜』‧『石洲五律』, 自批, 皆散不完. 『孟子』分爲四, 亦亡其一.
- 박제가(朴齊家, 1750~1805), 『정유각문집(貞蕤閣文集)』 권1 「열유시소서맹자서(閱幼時所書孟子叙)」
박제가는 어느 날 집안에 있는 책을 다 꺼내어말리다가 창고 한구석에서 상자 한 개를 발견하였다. 그 상자에는 그가 어릴 적 가지고 놀던 잡동사니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그는 잡동사니들을 하나씩 꺼내 살펴보며 자신도 모르는 새 감회에 젖어 들었다. 자신의 어린 시절이 떠오른 것이다.
상자에 든 잡동사니 속에는 박제가가 손수 베껴 적은 한 무더기의 책들도 있었다. 여러 권의 책들 가운데에서도 특히 네 권 중 한권이 없어지고 세 권이 남은 『맹자』 책은 그에게 어린 시절의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박제가는 어릴 적부터 글씨 쓰기를 좋아하여 붓을 물고 다니며 여기저기 닥치는 대로 글씨를 써댔다고 한다. 7살 때 집의 벽에 이미 하얗게 남아있는 곳이 없을 정도였기에 그의 부친 박평(朴坪)은 매달 종이를 내려주었는데, 그는 자기의 손가락 두 마디만 하게 종이를 오려 책을 만들고 책을 베껴 적었다고 한다. 이렇게 만드는 책들은 그가 자람에 따라 점점 커졌고, 이웃의 벗들이 빌려 가고 몰래 갖고 가는 통에 군데군데 이가 빠져버렸다. 그의 『맹자』 책은 그가 아홉 살 때 엮은 것이었고, 이 시기에 그가 베껴서 엮은 책들은 이미 책 상자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박제가의 『맹자』 책은 그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더듬을 수 있는 마지막 책이었다. 그는 11살 때 부친을 여의어 더 이상 책을 만들 형편이 되지 않았다. 이사를 자주 다니느라 이미 만든 책들도 대부분 잃어버렸다. 그는 『맹자』 세 권을 가져다 잘못 쓴 글자를 고쳐 쓰고 잃어버린 부분을 채워 넣고, 장정도 말끔히 새로 하고는 말했다.
이 또한 나의 벗이니, 벗은 벗으로서의 우정을 잃어서는 안 된다. 안타깝구나, 작은 책을 매느라 글자의 뿌리가 잘려나갔구나!
[此亦吾之故也, 故者毋失其故可矣. 惜乎, 幅短刀嚙字根!]
그는 자신의 어린 날을 더듬을 수 있는 『맹자』 책을 자신의 벗이라 일컬었고, 벗과의 우정을 함부로 저버려서는 안 된다는 공자(孔子)의 말을 인용하며, 지금은 자신이 어린 시절 베껴 쓴 『맹자』 책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정성 들여 장정하게 된 까닭을 밝혔다.
그렇다면 박제가는 왜 이미 잡동사니가 되어버린 『맹자』 책을 보고 감회에 젖어 들었을까? 어린 시절 베껴 쓴 『맹자』 책은 지금 보기에는 글씨는 삐뚤빼뚤한 데다 군데군데 빠지고 틀린 글자투성이이며 크기는 겨우 손바닥만 하다. 조악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이는 한편으로 그에게 지나간 세월과 변해버린 자신을 새삼스레 느끼게 하였을 것이다. 엉망인 글씨와 숱한 오탈자들은 보기 괴로울 정도였겠지만 어린 시절 자신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조그만 붓을 들고 구슬땀을 흘려가며 베껴 썼을 모습을 상상하면 한편으로는 대견하고 기특하였을 것이다. 또 당시에는 나름대로 적당한 크기라고 생각해 만들었을 책의 크기가 이제는 겨우 손바닥 만한 것을 보면 어느새 세월이 이렇게 지났나 싶기도 할 것이다. 만약 지금 『맹자』를 베껴 책으로 엮는다면 큰 종이에 틀리거나 빠뜨리는 글자 없이 단정한 글씨로 또박또박 옮겨 적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그는 굳이 『맹자』를 새로 베껴 책으로 만들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미 암기하여 머릿속에 들어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어린 시절 누가 시키지 않아도 즐거워서 스스로 글을 베끼던 열정이 어느샌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보다 지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월등해졌지만 이 열정만은 되찾을 수가 없다. 그는 『맹자』 책에서 어린 시절 열정이 가득하던 자신을 발견하는 동시에 지나온 세월 속에서 열정이 식어버린 자신을 발견하였을 것이 아닐까.
필자도 근래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필자는 얼마 전에 박사과정을 졸업하였다. 박사과정을 수료한 지 9년 만의, 기나긴 방황 끝의 졸업이었다. 컴퓨터로 졸업을 위한 행정적 절차를 처리한 뒤 잠시 컴퓨터를 뒤적이다 오래전에 썼던 석사논문을 발견하였다. 중간중간 넘겨 가며 읽어보았다. 묘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 보기에 내용이 결코 좋다고 할 수 없었지만, 논리를 엮어가고 말을 이어가려고 고심한 흔적, 필자 혼자만 알아볼 수 있는 그 노력의 흔적들이 새삼스레 감동적이었다. 이 시절의 내가 열심히 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스스로가 대견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지금의 나는 그때의 열정을 잃어버린 것 같아서 열정적이었던 그 시절의 젊은 한문학도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 시절의 나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박제가나 필자의 경험처럼, 옛 추억이 담긴 물건들은 지금 객관적으로 보기에는 별것 아닌 하찮은 물건인 경우가 많지만 종종 새로운 감동을 주곤 한다. 어떤 경우에는 잊고 있었던 추억을 떠올리게 하고, 어떤 경우에는 지금의 나를 돌아보게 하여 새로운 다짐을 하게 하기도 한다. 독자 여러분도 한번 추억이 담긴 물건을 꺼내서 그 시절의 자신과 마주해보는 것은 어떨까.
글쓴이 : 임영걸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대동문화연구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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