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향기가 난초 향기보다 향기롭다
다행스러운 것은 먼지 묻고 좀이 슨 책에 실려 있는 성현이 남긴 향기가
사람에게 난초 향기가 스며드는 것보다 더 향기롭다는 것입니다.
惟幸塵編蠹簡 聖賢遺馥 不啻如蘭臭之襲人.
유행진편두간 성현유복 불시여란취지습인.
- 이황(李滉,1501~1570) 『퇴계집(退溪集)』 17권 「답기명언(答奇明彦) 갑자(甲子)」
이 편지는 퇴계 선생이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1527~1572)에게 갑자년인 1564년(명종19) 12월 27일에 보낸 편지로 『퇴계집』에는 절략되어 실려있고, 『양선생왕복서(兩先生往復書)』 2권에 좀 더 완전한 모습으로 실려 있다.
이때 퇴계 선생은 고향에 물러나 있었는데, 고봉이 서울의 벼슬살이를 그만두고 광주로 내려갈 생각을 전해오자 쓴 편지이다. 이 편지에서 퇴계는 추운 겨울에 늙고 병든 몸 상태와 흉년으로 군색한 소식을 전하면서도 책을 읽는 낙을 말하고 고봉에게 벼슬에서 물러나 공부하게 되거든 대단한 성취를 하게 될 것이라고 권면한다.
퇴계와 고봉은 사단칠정논쟁으로 유명하다. 편지로 진행된 논쟁은 1559년부터 시작하여서 이때 이르러서는 이미 서로의 견해에 대해 편지를 충분히 주고받을 즈음이었다. 퇴계가 답장을 해야 하는 순서가 되었는데 답장을 미뤄두어 논쟁이 멈춰 있었다. 이 후 1566년 고봉이 퇴계의 설을 수용한 「사단칠정후설(四端七情後說)」, 「사단칠정총론(四端七情總論)」을 보내고 퇴계가 이를 승인함으로써 사단칠정논쟁이 끝나게 된다. 고봉의 날카로운 비판은 논쟁 상대자였던 퇴계가 가장 잘 알았다. 그런 고봉의 매서운 공격을 모두 견딘 퇴계의 저력과 인품이 돋보이는 구절이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모든 게 낯설어진 세상에서 3년째 봄을 맞는다. 봄의 향기도 봄 꽃놀이도, 캠퍼스의 낭만도 사라진 이상한 봄을 몇 해 째 겪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가족을 잃은 사람, 건강을 잃은 사람, 생계의 방도를 잃은 사람 등등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다. 이 역병의 시기가 빨리 지나가고 아픔과 슬픔이 낫기를 바란다. 그리고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과 책 읽는 모임을 갖고 왁자지껄하게 뒤풀이를 하고 싶다. 비록 내가 맡는 책 향기가 난초향기보다 진하지 않더라도…
글쓴이 : 남지만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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