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고전의 향기

혼조(昏朝)의 권신(權臣)에서 절신(節臣)으로

백광욱 2022. 3. 18. 00:03

 

혼조(昏朝)의 권신(權臣)에서 절신(節臣)으로  

 

< 번역문 >

이조가 아뢰기를,
    “충청도 진천(鎭川)의 유학(幼學) 박준상(朴準祥)의 상언(上言)에 대해 본조가 복계(覆啓)하였는데, 그 8대조 박승종(朴承宗) 및 그 아들 박자흥(朴自興)의 관작을 회복시키는 일을 대신(大臣)에게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윤허하셨습니다.
    우의정 조두순(趙斗淳)은 말하기를, ‘박승종은 혼조(昏朝)의 고굉지신(股肱之臣)이자 폐부(肺腑)와 같은 인척으로서 16년을 지냈습니다. 만약 그가 임금의 과실을 바로잡고 이의를 제기하여 잘못이 없는 곳으로 임금을 인도하였다면, 실로 생사를 함께하여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윤리와 기강이 무너지고 사라진 때를 당하여 한마디 말이라도 내어 천지의 경상(經常)을 지킨 일이 있었습니까. 다만 생각하건대, 혼조를 위해 죽음을 택한 것은 당시를 두루 살펴보아도 앞에는 박승종 부자가, 뒤에는 유몽인(柳夢寅)만이 있을 뿐입니다. 유몽인은 오래전에 이미 신원되는 조치를 입었으나, 박승종의 경우에는 답답함이 아직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대개 임금을 섬기는 의리는 치란(治亂)에 관계하지 않고 신하된 도리는 목숨을 바치는 데 있습니다. 지금 「절의를 다했다[盡節]」는 기준을 박승종에 갖다 댄다면 아마도 적절한 것이 아니겠지만, 필부(匹夫)의 조그마한 신의로 박승종을 단정한다면 또한 알맞은 논의가 아닐 듯합니다. 더구나 정묘조(正廟朝)께서 전후로 내린 판부(判付)가 분명히 갖추어져 있고 선배 명현들이 지은 글에도 충분히 근거할 만한 점이 있으니, 지금 그 죄안을 살펴 박승종 부자의 관직을 회복시키는 것은 원통함을 풀어주는 정사에 해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시일이 오래된 사안이라 신이 마음대로 판단할 바가 아니니, 다시 널리 묻도록 하는 것이 진실로 살피고 신중히 하는 도리에 합당합니다.’ 하였습니다. 상께서 재결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전교하기를,
    “생사의 경계에서 사람을 논하는 일은 어려운 것이다. 이 사람이 죽음을 결단한 일은 제 자리를 얻어 죽은 경우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묘께서 내리신 판부가 존재하고 선현들의 논의가 곧 공안(公案)이니, 지금 어찌 굳이 다시 물을 것이 있겠는가. 박승종 부자의 관작을 특별히 회복하도록 하라.”
하였다.

 

< 원문 >

吏曹啓言: “忠淸道鎭川幼學朴準祥上言, 臣曹覆啓, 而其八世祖承宗及其子自興復官爵事, 議于大臣處之事, 允下矣. 右議政趙斗淳以爲: ‘朴承宗受股肱之托, 處肺腑之親, 十有六載矣. 苟有匡拂違覆, 納君於無過, 則固當生死以之, 他不暇計. 而當倫綱斁滅之際, 其能出片言發單辭, 以守天地之經常乎? 第念爲昏朝辦一死, 歷選當時, 前有承宗父子, 後有柳夢寅而已, 夢寅之伸雪旣久, 承宗之幽鬱自在矣. 蓋事君之義, 不係治亂, 爲臣之道, 所在致命. 今以盡節擬承宗, 則或非其倫, 而以匹夫溝瀆之諒斷承宗, 則亦恐非稱停之論. 伏況正廟朝前後判付, 剖析備摯, 先輩名碩, 流傳文字, 亦綽有可據, 今核其案而復其父子之官, 不害爲疏伸之政. 而事係久遠, 非臣所顓斷, 更令博詢, 允合審愼云.’ 請上裁?” 敎以, “論人於死生之際難矣. 此人之辦得一死, 可不曰死得其所乎? 正廟判付自在, 先賢立論, 便是公案, 今何必更詢? 朴承宗父子, 特令復其官爵.”

 

- 『일성록(日省錄)』 철종 8년 6월 9일

 

< 해설 >

조선 시대 상언(上言)‧격쟁(擊錚)은 개인적 억울함을 지닌 일반 백성들이 조정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창구로서 역할하여, 신원‧추숭‧사면 같은 숱한 바람들이 이 제도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러한 요청의 수용 여부에 따라 과거에 내려졌던 하나의 판단이 후대에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귀결되기도 하였다.

    조선 중기의 박승종(朴承宗, 1562~1623)은 그 아들 박자흥(朴自興)의 딸이 광해군(光海君)의 세자빈이 되면서 왕실의 인척이 된 인물이다. 이후 그는 밀창부원군(密昌府院君)에 봉해지고 영의정에까지 오르는 등 당대 최고의 지위를 점유하여, 이이첨(李爾瞻)‧유희분(柳希奮)과 함께 광해조의 권신(權臣)을 일컫는 ‘삼창(三昌)’으로 병칭되기도 하였다. 그러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군사를 모아 이를 저지하려 시도하였다가, 일이 틀어진 것을 알고는 아들 박자흥과 함께 자결하였다. 인조 즉위 후 그는 광해군의 핵심 측근이었다는 이유로 관작이 삭탈되고 가산이 적몰되었으며, 그 뒤 자연스레 혼군(昏君)의 정사를 방조한 인물로서 오랜 기간 동안 인식되었다. 물론 그의 행적과 처신에 대해 재론하고자 하는 시도가 일정하게 존재하기는 하였으나, ‘난정(亂政)을 방관한 권신(權臣)’이라는 평가는 큰 변화 없이 조선 후기까지 이어졌다.

    이와 같은 박승종의 위상에 변화가 일어난 것은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1790년(정조14) 충청도 청안(淸安)에 살던 박승종의 6대손 박진덕(朴晉德)이 상언하여, 박승종은 애초에 폐모론(廢母論)에 동참하지 않았고 반정 시에도 광해군을 향한 자신의 지조를 온전히 지키기 위해 자결을 택하였다고 하면서 그의 신원을 청한 것이다. 그러나 이 상언은 과거에 이미 참작하여 결정된 공의(公議)가 있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시일이 오래 지난 사안을 방자하게 호소하였다는 이유로 박진덕을 감처(勘處)하라는 조치가 내려졌다.

    그러나 박승종에 대한 신원 노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충청도 직산(稷山)의 유학 박기복(朴基復)‧박기덕(朴基德) 등이 1792년부터 1807년까지 15년 동안 총 6차례에 걸쳐 상언하여 박승종과 그 아들 박자흥의 복관을 청하였고, 그 다음 세대인 박응진(朴應鎭)도 1824년부터 1834년까지 4차례에 걸쳐 조상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던 것이다. 상언에서 이들은 박승종이 애초에 폐모론에 참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광해군 재위 당시 혼란한 정사를 바라보며 탄식을 거듭하였고 반정 소식을 듣고는 혼조(昏朝)에 복무한 노신(老臣)으로서 결연히 죽음을 택하였다는 점을 두루 언급하면서, 그가 보인 절의의 측면을 한층 크게 부각시켰다. 비록 ‘삼창’의 일원으로서 광해군의 정사에 일조한 일이 뚜렷하다는 이유로 이들의 상언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사안의 처리를 위해 대신(大臣)의 수의(收議)가 행해지는 등 이 일이 점차 조정 차원에서 진지하게 논의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하였다.

    조정의 숱한 반려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이어진 후손들의 하소연이 결실을 본 것은, 시간이 조금 더 흐른 1857년(철종8)의 일이었다. 이해에는 박승종의 8세손인 충청도 진천(鎭川)의 유학 박준상(朴準祥)이 상언을 올렸다. 이에 대해 우의정 조두순(趙斗淳)은, 박승종이 비록 광해군의 척신(戚臣)이며 당시의 혼정을 방관한 혐의는 있지만, 군주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신하로서의 도리를 지킨 점은 높이 평가될 만하다고 말하였다. 더욱이 유몽인(柳夢寅)도 광해군을 위해 절의를 지킨 점이 인정되어 뒤늦게나마 신원된 일이 있음을 언급하며, 박승종 부자에게도 그와 같은 조처가 내려지는 것이 마땅하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결국 이러한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마침내 박승종 부자는 사후 230여 년만에 생전에 그들이 지녔던 관직을 되찾을 수 있었다. 나아가 박승종은 1871년(고종8) 조정으로부터 ‘숙민(肅愍)’이라는 시호까지 하사받음으로써, ‘광해조 절신’으로서 확고한 국가적 공인을 얻을 수 있었다. 혼조의 ‘권신’에서 ‘절신’으로, 극적인 위상의 변화가 일어난 순간이었다.

    이처럼 박승종은 혼조의 조력‧방관자로서 오랜 세월 동안 인식되었으나, 후손 박진덕부터 박준상까지 3대에 걸쳐 이루어진 67년 간의 긴 상언 활동 끝에 마침내 광해군 절신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박승종의 사례는, 조상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지속적으로 힘을 기울인 그 후손들의 간절함, 광해군과 같은 혼군에 대해서조차 ‘절신’의 존재를 인정해 주었던 조선 후기의 시대적 분위기, 그리고 상언이 지닌 여론 조성의 힘과 사회적 역할을 아울러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역사적 사실의 확정과 평가는, 때로 그 자체로 주어지지 않고 끊임없는 노력과 치열한 투쟁의 과정을 거친 끝에 비로소 얻어지기도 한다. 

 

글쓴이  :  정용건
강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BK21사업팀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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