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화에서 눈을 밟다
강변 물새들의 자취는 사라지고
천상의 옥가루가 선장(仙掌)에 날린다
공중에 어지럽게 흩뿌리다 별안간 바람 따라 날리더니
평지에 가득 쌓여 어느새 한 길 높이가 되었네
몇 말이나 되는 술이 집집마다 가득하고
온갖 데에는 눈꽃이 촌죽(村竹)을 누르고 있구나
옷 전당 잡히고 마신 술의 취흥이 온천지에 횡행하니
백년 인간사가 한 순간이로다
江邊鷗鷺絶影響 강변구로절영향
天上玉屑霏仙掌 천상옥설비선장
空中散亂乍隨風 공중산란사수풍
平地彌漫忽盈丈 평지미만홀영장
十千斗酒盈比屋 십천두주영비옥
滿目瓊花壓村竹 만목경화압촌죽
典衣醉興橫八荒 전의취흥횡팔황
百年人事一瞬息 백년인사일순식
- 성임(成任, 1421~1484),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3권, 「한성부 십영 양화답설(漢城府 十詠 楊花踏雪)」
< 해설 >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의 「한성부」에는 서울의 열 곳 승경을 읊은 ‘십영(十詠)’이 기록되어 있다. ‘십영’은 장의심승(藏義尋僧, 장의사의 중을 찾아가다), 제천완월(濟川翫月, 제천정에서 달을 구경하다), 반송송객(盤松送客, 반송정에서 객을 전송하다), 양화답설(楊花踏雪, 양화에서 눈을 밟다), 목멱상화(木覓賞花, 목멱산에서 꽃을 감상하다), 전교심방(箭郊尋芳, 살곶이에서 꽃놀이하다), 마포범주(麻浦泛舟, 마포에서 배를 띄우다), 흥덕상연(興德賞蓮, 흥덕사에서 연꽃을 감상하다), 종가관등(鍾街觀燈, 종로에서 등을 구경하다), 입석조어(立石釣魚, 입석포에서 고기를 낚다)이다.
그중 ‘양화답설’을 읊은 성임(成任)의 작품을 소개해 본다. 성임은 조선전기 문신으로 서예에 특히 뛰어났으며 아우인 성간(成侃), 성현(成俔)과 함께 문명으로 이름이 높았다. 양화는 지금 마포구 합정동 인근 양화대교가 지나는 일대로 예부터 경치가 좋아 망원정을 비롯해 여러 정자가 들어섰던 곳이다. 평소도 절경이라 이름난 곳인데, 눈 오는 풍경이 얼마나 대단하였기에 ‘십영’에 꼽혔던 것일까? 지금은 옛 모습이 남아 있지 않아 시를 통해 상상해 볼 수밖에 없다.
위 시 2구에 보이는 ‘선장(仙掌)’은 ‘선인장(仙人掌)’이라고도 하는데, ‘신선의 손바닥’이란 뜻이다. 한(漢) 나라 무제(武帝)가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인 감로수를 받으려고 구리 기둥을 세우고 선인의 손바닥 모양의 쟁반을 설치한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선장에 받은 이슬에 옥가루(玉屑)을 타서 마시면 불로장생을 한다고 전해진다. 옥가루가 선장에 날린다는 표현은 지척의 잠두봉이나 지금은 사라진 선유봉 위로 눈이 날리는 풍경을 형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 풍경이 선계(仙界)의 모습인양 착각을 일으킬 만큼 대단히 신비로웠던 모양이다.
날리던 눈이 한 길이나 푹 쌓이고 푸른 댓잎도 하얀 눈꽃에 덮였으니, 이 풍경에 술 마시는 풍류가 제법 좋았을 것이다. 실제로 이 일대에는 겨울이 되면 강물이 얼어 물고기를 잡을 수 없던 어가(漁家)에서 술을 팔곤 했다. 성임도 근처에서 술을 사서 마셨다. 취기에 바라본 양화의 신비로운 설경은 그의 정신을 웅혼하게 하였고, 사방 천지까지 관통하는 정신으로 관조한 인간사는 백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속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그 시절 양화의 설경은 초월의 신비로움과 가슴을 웅장하게 만드는 장엄함이 그 매력이 아니었을까.
조선시대 양화에는 경기 서부로 가기 위해 건너야 했던 양화진(楊花津)이 있었다. 또 이곳은 한강을 통해 올라온 삼남의 곡식을 저장하던 곳이었고, 교통의 요충지여서 군사 시설인 진(鎭)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잠두봉은 천주교 선교사들이 순교한 곳으로 현재 절두산성지로 지정되어 있다. 지금은 옛날과 너무나 달라져 그 시절 풍경도 겨울의 설경도 볼 수 없으니 아쉬울 따름이다. 「한성부」 ‘십영’에는 성임을 비롯하여 월산대군(月山大君), 강희맹(姜希孟), 서거정(徐居正), 이승소(李承召)가 지은 ‘양화답설’이 함께 실려 있다. 모두 문장의 대가로 꼽히는 분들로 같은 운자(韻字)를 사용하여 저마다 양화의 설경을 묘사했다. 이 겨울이 끝나기 전, 눈이 또 온다면 그들이 남긴 시를 감상하며 양화를 거닐어 보는 것도 좋겠다.
글쓴이 : 김준섭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