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망상
흙덩이 뭉쳐 떡 만들어 소꿉 노는 아이들
앞 다투어 몰려다니며 머리채를 잡아 뜯네
벼슬판 난장 다툼 이와 다를 게 무에랴
명줄 닳고 몸 망쳐도 알지를 못하누나
團土作糕戱小兒 단토작고희소아
爭來爭去髮相持 쟁래쟁거발상지
宦塗傾奪曾何異 환도경탈증하이
捨命捐身不自知 사명연신부자지
- 안정복(安鼎福, 1712~1791), 『순암집(順菴集)』 권1 「감회가 있어[有感]」 제1수
권력은 무엇이며 권력은 왜 가지는가.
토마스 홉스는 그의 저서 『리바이어던(Leviathan)』에서 그 유명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Bellum omnium contra omnes]”을 제창한 바 있다. 곧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개인의 만족스러운 생활과 자기 존재의 보존을 추구하는 본능을 지니고 있고, 개별 인간 모두가 동등하게 소유한 이 본능은 필연적으로 갈등과 투쟁을 유발하여 나의 온전한 이익과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기꺼이 모사꾼과 약탈자와 침략자가 되며 폭력은 필수불가결의 수단이 되어 모든 인간이 모든 인간에 대해 폭력으로 투쟁하는 전쟁 상태에 돌입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조정하고 평화를 도모하는 사회와 국가의 존재, 그리고 그 사회와 국가를 대표하는 대표자의 존재가 필요하며, 이 존재에게 공동체 구성원들이 자신의 권한을 일정 부분 포기하고 위임한다는 사회계약론의 토대가 여기에서 마련되었다. 물론 홉스의 사상을 깊이 따지고 들어가면 억압적 통제와 같은 치명적인 한계가 있지만 여기에서 출발하여 이후 많은 사상가들을 거쳐 법과 국가에 의한 민주적 통치라는 현대 사회의 체제가 발전 확립되었다.
권력은 기본적으로 통제와 조정이라는 공동체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구성원들의 합의와 희생으로 도출되고 위임되었다는 측면에서 그 자체로 경건하다. 권력의 목적은 다수 대중의 이익과 안전을 조정하기 위한 것이고 이를 위해 불가피하게 위임된 것이며, 공동체의 대표자로 선정되어 이 경건한 권력을 감히 행사할 때에는 그야말로 살이 떨리고 등줄기에 땀이 나는 전율(戰慄)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권력의 행사로 발생한 과실(果實)은 공동체 구성원과의 계약에 따라 반드시 공동체로 귀속되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고 그 과실을 위임된 권력의 대표자가 가로챈다면 이는 계약의 위반이며 주벌(誅伐)의 대상이다.
그러나 권력의 모순은, 이익을 추구하는 본능을 가진 인간이 이익을 조정하고 환원하는 대표자가 되었다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유사 이래로 권력의 속성이 추악하다고 인식된 데에는 바로 권력의 대표자가 자신의 임무를 망각하고 본래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자기 것으로 망상하여 대표자의 지위에 서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이를 방지하고 계도하기 위해 동서양의 수많은 사상들은 군주의 덕성을 함양하거나 촘촘한 제도적 틀을 만드는 방식을 다양하게 고안해왔다. 그러나 임무를 망각한 인간의 본능은 쉽사리 제어되지 못했다. 자기 것이 아닌 허깨비 같은 권력의 과실을 차지하고자 추악한 아귀다툼을 벌이다가 명줄을 재촉하고 패가망신하는 일은 도무지 사라질 줄을 모른다.
이 시를 지은 안정복은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학통을 이어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실용적 학문을 모색하였으며 특히 사학(史學) 방면에서 출중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그의 스승인 성호와 마찬가지로 당대 권력에서 소외된 남인(南人)으로 만년에 가서야 만녕전 참봉(萬寧殿參奉), 의영고 봉사(義盈庫奉事),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목천 현감(木川縣監) 등의 미관말직을 잠시 맡았을 뿐 자신의 뜻과 사상을 실제 정치에 적용하여 펼쳐보지 못하고서 투철하고 순수한 학자의 일생을 살다가 세상을 마쳤다. 경세치용을 중시하고 실제적인 학문을 하던 안정복이 볼 때 벼슬판의 권력 다툼이란 것은 그저 흙으로 만든 가짜 떡을 가지고 다투는 아이들의 난장판 싸움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속에 무슨 인민의 복지가 있으며 사회의 안녕이 있었던가. 설혹 입으로 그것을 떠든다고 해도 그 안에 무슨 실질이 있었겠는가. 제 것이 아닌 허깨비 같은 것을 두고 다투며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이 멈추지 않는 정치판을 냉소하면서 그저 묵묵히 자신의 학문을 닦고 후대에 남길 저술을 써내려갔을 따름이다.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 어찌 나쁜 것이겠는가. 그것은 사회 체제가 만들어 낸 불가피한 권한이며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내놓은 계약의 산물이다. 권력의 본질을 투철히 이해하고 그 행사에 전율한다면 흙떡을 다투다 패가망신하는 일이 없을 터인데,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문제 앞에 투철하며 전율한 이들이 얼마나 되는가. 이 두려운 일 앞에 그저 개인의 이익과 안전을 추구하고 섣부른 공명심으로 발끈하여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벌이는 어리석은 짓이 언제나 멈춰지려는가. 혹 멈출 수 없거든 주벌이 무섭지 않겠는가. 두려워하고 두려워할 일이다.
글쓴이 : 이승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권역별거점번역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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