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를 기르는 이유
도적이 없다고 도적을 못 잡는 신하를 기르지는 않는다.
不以無盜而養不捕之臣
불이무도이양불포지신
- 조귀명(趙龜命, 1693~1737), 『동계집(東谿集)』권5 「오원자전(烏圓子傳)」
< 해설 >
조귀명의 「오원자전」은 고양이를 오원자라는 인물로 의인화하여 쓴 가전이다. 작중에서 오원자는 원래 미천한 신분에 도적질까지 일삼던 금수 같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도적 자씨 일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오원자의 능력을 알아본 황제의 특명을 받고 도적떼의 소굴로 진격하여 일망타진하는 공을 세운다. 황제는 크게 기뻐하며 오원자에게 포상으로 고기와 가죽과 ‘오원자’라는 제후의 작위, 국방과 치안을 담당하는 부서의 수장 자리를 하사한다. 그리고 오원자의 공을 치하하는 조서(詔書)를 내리는데 위에서 인용한 부분은 바로 이 조서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작품의 핵심 주제는 위정자의 올바른 통치술, 그중에서도 능력 중심의 인재 활용과 유비무환의 자세라고 할 수 있다. 황제는 신분이나 과거의 행실에 구애받지 않고 능력만으로 인재를 발탁하여 공을 세울 수 있게 하였다. 또한 도적이 소탕되었다고 해서 오원자를 토사구팽하지 않고 ‘도적을 못 잡는 신하’가 아닌 오원자를 도적을 잡는 관직에 임명하였다. 과거의 공적 때문만이 아니라, 도적떼가 다시 활개 칠 앞날을 대비하기 위해서 포상을 내린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 작품이 주는 교훈은 비교적 단순하며 부연할 만한 여지가 별로 없다. 그러니 관점을 바꿔보자. 오원자라는 ‘인물’이 아니라 오원자로 의인화된 ‘고양이’로.
주인 없이 돌아다니는 고양이가 있었다. 이 녀석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생선을 훔쳐 먹거나 닭을 잡아먹어 사람들의 골치를 썩였다. 그런데 어느 집에 쥐가 들끓기 시작했다. 집주인은 온갖 방법을 써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던 중 어떤 사람에게 고양이가 쥐를 잘 잡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고양이를 데려와 집에 풀어놓았다. 고양이는 쥐구멍을 찾아다니며 쥐의 씨를 말려버렸다. 주인은 기뻐하며 고양이에게 고기도 주고 추위를 피할 보금자리도 만들어 주었다. 더 이상 고양이가 잡을 쥐는 없었지만 이름을 지어주고 식구로 맞아들였다. 사람들은 주인을 이해하지 못했다. 집을 지키는 개, 농사를 돕는 소, 사람과 짐을 실어 나르는 말과는 달리 고양이는 쓸모가 없지 않은가. 주인은 항변한다. 지금은 없지만 나중에 다시 쥐가 나오면 어떻게 하겠냐고. 「오원자전」을 다시 ‘의묘화(擬描化)’하면 이상과 같은 이야기가 될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쥐를 막기 위해 고양이를 기르지 않는다. 사람들의 생활공간에 쥐가 나타나는 경우도 점점 드물어지고 있거니와, 쥐가 나오더라도 전문 업체가 처리한다. 그렇다면 왜 고양이를 기르는가. 옛날의 고양이는 식구라 해도 가축일 뿐 가족은 아니었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고양이를 가족처럼, 혹은 진짜 가족 이상으로 아끼고 사랑한다. 가족에게서나 얻을 수 있던 평안함과 온기를 고양이로부터 받는다. ‘아직’ 고양이와 함께 하지 않는 사람들은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에서 고양이의 영상과 사진을 보며 고양이를 가지지 못한 아쉬움을 달랜다. 핵가족화를 넘어 딩크족이나 1인 가구의 비중이 늘어난 요즘 고양이의 역할은 더 이상 쌀을 축내는 쥐를 막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축내는 외로움과 공허함을 막는 것이 되었다.
어쩌면 옛날에도 다르지 않았을지 모른다. 숙종이 사랑한 고양이의 이야기는 여러 매체를 통해 많이 알려져 있다. 붕당의 대립이 격화되던 정국에 수차례의 환국을 단행하고 사림의 거두인 송시열을 단호하게 처형했던 냉혹한 정치가 숙종도 자신이 기르는 고양이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고 따뜻한 ‘집사’였다. 숙종도 많이 외로웠던 것일까. 물론 외롭지 않아도 고양이는 사랑스럽다. 예나 지금이나.
글쓴이 : 최두헌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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