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고전의 향기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

백광욱 2020. 1. 2. 06:49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


예수의 교법을 듣자니
원한 잊고 원수를 사랑하라 하네
하늘 함께 이지 않는단 말씀 돌아보라
이 이치가 바로 천추에 빛나는 것이지

 

聞道耶蘇法문도야소법
忘讐又愛仇망수우애구
回看天不共회간천불공
此理炳千秋차리병천추

 

- 김평묵(金平黙, 1819~1891), 『중암집(重菴集)』 권3 「서교(西敎)에 원한을 잊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곧 인정에 가깝지 않은 말이다. [西敎有忘讐愛仇之語 直是不近人情]」


< 해설 >

 ‘복수’와 그 허용 여부는 개인과 집단을 막론하고 어느 민족, 어느 시대에나 심각한 과제였다. 특히 동아시아인의 관념과 언어 속에 깊숙이 깃들어 있는 “아버지의 원수와는 같은 하늘 아래 살지 않는다. [父之讐 弗共戴天]”는 명제는 공적인 ‘법(法)’의 논리와 사적인 ‘효(孝)’의 윤리 사이에서 첨예한 모순을 이미 안고 있다. 이를 두고 동아시아 지식인들은 일찍부터 논쟁을 펼치기도 하였다.

 

   한말 격동기 유림의 거장으로, 스승 이항로(李恒老 1792~1868)를 이어 위정척사(衛正斥邪)를 선도하였던 중암(重菴) 김평묵 역시 그 전통을 잇고 있다. 그가 지은, 아버지가 억울한 소송에 휘말려 형장(刑杖)을 맞아 죽자 소송 상대자를 칼로 찔러 죽인 두 아들을 효자로 표창한 기문(「북청이효자정려기[北靑二孝子旌閭記]」, 『중암집』권43)에서도 서교의 ‘망수애구(忘讐愛仇)’를 들어 ‘천리를 거스르고 인심을 저버리는 것[逆天理 拂人心]’이라는 인식을 분명히 하고 있다. ‘양이(洋夷)’와 ‘일제(日帝)’라는 국가적 원수를 눈앞에 둔 상황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언명이 더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왔음은 어렵지 않게 헤아릴 수 있겠다.

 

   ‘원수’는 타자의 극단이고, ‘사랑’은 단계적이어야만 하는 유교의 윤리로 볼 때, ‘원수를 사랑하라’는 교법은 분명 모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종교적 가르침의 극치는 그러한 모순을 초월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극기(克己)’ 또는 ‘무아(無我)’라고 명언함직한 ‘이기심’ 또는 ‘욕망’의 무화(無化)이며, 바로 예수 ‘십자가’의 의미일 것이다. 모순에 가득 찬 현실을 직면하고 “총칼이 되기보다는 사랑을!” 이라고 외치며 영원한 불꽃이 된 청년 노동자 역시 그 십자가를 온몸으로 진 것이 아닐까?

 

   곧 성탄일이다. 성탄은 늘 복음처럼 지나가고 또 도래한다. 단지 하루의 휴일로 지나기보다는 원수조차 사랑하라고 했던, 살아 있었고 또한 지금도 살아 있는 예수의 가르침을 한번쯤 생각해 보는 것도 좋겠다. 그리고 이 땅의 새로운 ‘종교개혁’을 위해 연일 사자후를 토하는 노석학(老碩學)에게도 깊은 경의를 표한다.


글쓴이정동화
한국고전번역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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