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틈의 달
< 번역문>
사방으로 통하는 길거리와 큰길 가운데에도 또한 한가함이 있으니, 마음이 진실로 한가하다면 어찌 반드시 강호에 있고, 산림에 있을 필요가 있겠는가? 내 집은 시장 근처라 해가 뜨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소란하고, 해가 지면 마을의 개들이 모여 짖어대지만, 나만은 편안하게 글을 읽는다. 때로 문을 나서면 사람들이 땀 흘리며 걸어가고, 말을 타고 내달려서 수레와 말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지만, 나만은 천천히 걸으며 소란 속에 한가함을 잃어 본 적이 없으니 이는 나의 마음이 한가하기 때문이다. 저들은 마음이 어수선하지 않는 자가 적으니 그 마음에 각기 꾀하는 일이 있어서이다. 장사하는 자는 작은 수치까지도 따지고 【1자 원문 빠짐】, 벼슬하는 자는 영욕을 다투고, 농사짓는 자는 밭 갈고 김매는 일에 【1자 원문 빠짐】 골몰하여 날마다 그것에 대해 생각한다. 이 같은 사람들은 영릉(零陵)의 남쪽 소수(瀟水)·원수(沅水)의 사이에 놓아두더라도 손을 깍지 끼고 앉아 졸면서도 골몰하는 일에 관해 꿈꿀 것이니, 어찌 한가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러한 까닭에 “마음이 한가하면 몸은 저절로 한가해진다.”고 말한다.
원문 |
通衢大道之中, 亦有閒, 心苟能閒, 何必江湖爲山林爲? 余舍傍于市, 日出, 里之人市而閙, 日入, 里之犬羣而吠, 獨余讀書安安也. 時而出門, 走者汗, 騎者馳, 車與馬旁午而錯, 獨余行步徐徐, 曾不以擾失余閒, 以吾心閒也. 彼方寸不擾擾者, 鮮矣, 其心各有營爲. 商賈者【缺】錙銖, 仕䆠者爭榮辱, 田農者【缺】耕鋤, 營營焉, 日有所思. 如此之人, 雖寘諸零陵之南, 瀟沅之間, 必叉手坐睡, 而夢其所思, 奚閒爲? 余故曰, “心閒身自閒.”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영처문고(嬰處文稿)』2권, 「원한(原閒)」
< 해설 >
현대의 생산 방식은 우리 모두가 편안하고 안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한쪽 사람들에겐 과로를, 다른 편 사람들에겐 굶주림을 주는 방식을 선택해 왔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기계가 없던 예전과 마찬가지로 계속 정력적으로 일하고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어리석었다.
-버트런드 러셀 저, 송은경 역, 『게으름에 대한 찬양』, 사회평론, 2005, 33면
많은 것이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오늘날, 그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기 위한 바쁨은 미덕으로 간주된다. 버트런드 러셀은 그 진행 속도에 기계가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 말한다. 그런데 기계가 없던 옛날에도 세상은 분주하였다. 이 때문일까? 예전에도 ‘망중한(忙中閑)’이라는 말이 있었다. 현재까지도 이 말이 사용되지만, 최근에는 ‘워라밸(Work & Life Balance)’이라는 신조어가 사람들 입에서 자주 오르내린다. 이 신조어에는 일과 삶에 균형을 통해, 바쁜 와중에도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소망이 담겨 있다. 결국, 말만 바꿨을 뿐이지 예나 지금이나 한가로움은 사람들에게 추구의 대상이었던 셈이다.
이덕무가 살았던 조선후기에도 사람들은 분주하였다. 그는 26세(1766년) 때 마포에서 현재 종로 일대인 대사동(大寺洞)으로 이사하였다. 대사동이라는 이름은 큰 절인 원각사(圓覺寺)가 있던 데서 유래되었는데, 그곳에는 국보 제2호인 원각사지 십층석탑이 남아있다. 휘영청 달 밝은 밤이 되면 대리석인 이 탑은 달빛을 받아 더욱 하얗게 빛났다. 해서 당시 사람들은 이 탑을 백탑(白塔)이라 불렀고, 이덕무는 달밤에 백탑 주변에서 박지원·박제가·유득공·이서구 등과 교유하였기에, 이들을 백탑파(白塔派)라 부르기도 한다.
위에 제시한 글은 이 당시에 지은 것으로, 관습적 글쓰기보다는 특이함을 선호하였던 젊은 시절 이덕무의 성향이 잘 드러난다. 제목에서 보듯이, 「원한(原閒)」은 한가함에 대해 따져본 글이다. 그런데 왜 한가로운지에 대한 주장보다는 세밀한 묘사를 통해 번잡스러움을 생생하게 재현하는 데 주력하였다. 조선후기 종로 일대는 가장 번성한 곳이었고, 이덕무는 사람들이 모이는 시장 근처에 살기 때문에 주변 환경이 번잡하기가 그지없었다. 이곳은 조금이라도 시간을 아끼기 위해 달리는 사람, 달리는 것도 모자라서 말을 탄 사람들이 정신없이 오갔다. 여기에다 사람들의 다투는 소리, 밤에는 개들이 짖어대는 소리 때문에 밤낮없이 소란스러웠을 것이다. 따라서 이덕무의 눈과 귀에는 한가로움을 방해하는 요소들로만 가득했다.
그럼에도 이덕무는 스스로 한가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에 비해 사람들이 한가하지 못한 것은 몸이 바빠서가 아니라, 각자 마음에 꾀하는 일이 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이윤을 많이 남길 것인가?’에 골몰하기에 날마다 분주하다. 벼슬하는 자와 농자 짓는 자들도 저마다 위치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마음속에서 생각하느라 쉴 틈이 없다. 가령 이들을 경치 좋은 중국의 동정호(洞庭湖)에 옮겨놓더라도 절경을 감상하기보다는 졸면서도 밤낮이고 매달렸던 일을 생각할 것이다. 결국, 이덕무가 시끄러운 시장에 살면서도 스스로 한가로울 수 있었던 이유는 몸이 한가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한가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담박하게 “마음이 한가하면 몸은 저절로 한가해진다.”라는 체험적 진실을 말할 수 있었다.
원래 한(閒)이라는 한자는 문틈 사이로 달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음을 뜻한다. 이 때문에 틈이나 사이의 뜻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한가로움은 틈, 겨를, 여유와도 연계되어 있다. 고려 말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의 「운금루기(雲錦樓記)」에서는 “사슴을 쫓아가는 사람은 산을 보지 못하고, 금을 움켜잡으려는 사람은 사람을 보지 못한다. 가을에 돋는 짐승의 가는 털을 볼 줄 알면서도 수레에 가득 실은 섶을 보지 못하는 것은 마음이 쏠리는 곳이 있으면 눈이 다른데 볼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逐鹿而不見山, 攫金而不見人. 察秋毫而不見輿薪, 心有所專而目不暇他及也.].” 하였다. 이제현도 이덕무처럼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 주변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고 말한다. 어디에 있느냐가 아니라, 느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본다면, 한가로움은 문틈 사이로 달빛이 새어 들어오는 그 짧은 겨를을 알아챌 수 있는 마음의 여유라 하겠다.
복잡한 방해요소들로 가득한 오늘날 한가로움은 더더욱 마음에 달려있다 하겠다. 하지만, 마음은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누구나 마음먹은 대로 된다면 ‘한가롭다’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거나, 한가로움은 더 이상 사람들에게 희구의 대상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도 휴대하고 다니는 전화에서 들려오는 첫 마디는 ‘바쁘니?’이다. 이덕무와 그 친구들처럼 달밤에 백탑 아래에서 야유(夜遊)를 즐기지는 못하겠지만, 창문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달빛을 보며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한가로움을 전해야겠다.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라고.
글쓴이김경
고려대학교 한자한문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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