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출 수 있는 용기
< 번역문 >
위험한 곳을 만나 멈추는 것은 보통 사람도 할 수 있지만 순탄한 곳을 만나 멈추는 것은 지혜로운 자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그대는 위험한 곳을 만나 멈췄는가? 아니면 순탄한 곳을 만나 멈췄는가? 뜻을 잃고 멈추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뜻을 얻고 멈추는 것은 군자만이 할 수 있다. 그대는 뜻을 얻고 멈췄는가? 아니면 뜻을 잃은 후에 멈췄는가? ‥‥‥ 위험한 일을 만났을 때 멈출 수 있고, 뜻을 잃었을 때 멈출 수 있는 자이면 나는 일반인보다 현명하다고 말하겠다. 그 위에 있는 사람이야 논할 것이 무에 있겠는가? 한 번에 멈출 수 있는 것은 현자의 일이다. 멈추고, 또 멈추면서 다시 나아갈까 두려워하는 것은 힘써서 가능해진 사람이다. 현자는 내가 볼 수 없어도 힘써서 가능해진 자를 볼 수 있으면 또한 다행이다. 그대는 힘써 그 이름을 저버리지 말고 이 말을 소홀히 하지 말라.
원문 |
遇險而止, 凡夫能之, 遇順而止, 非智者不能. 予其遇險而止歟? 抑能遇順而止歟? 失意而止, 衆人能之, 得意而止, 唯君子能焉. 予其得意而止歟? 抑亦失意而後止歟? ‥‥‥ 於是而有遇險而能止者, 於是而有失意而能止者, 吾亦謂之賢於人也. 尙奚論乎其上哉? 一止則已賢者事也. 止而又止, 唯恐其復進, 彊而能者也. 賢者吾不可見爾, 得見彊而能者, 亦幸焉. 予其勉之, 毋負乎斯名, 毋忽乎斯言.
-홍길주(洪吉周, 1786-1841), 『현수갑고(峴首甲藁)』 「지지당설(止止堂說)」
< 해설 >
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은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에는 다음의 이야기가 있다. 소작농인 바흠은 바시키르 마을의 촌장으로부터 천 루블만 내면 종일 밟은 땅을 모두 차지해도 좋다는 계약을 맺는다. 단 해가 질 때까지 출발지점으로 돌아오지 못하면 무효라는 조건이었다. 다음날 바흠은 동이 트자마자 신이 나서 앞으로 걸어갔다. 점심이 지나 돌아올 지점을 지났는데도 그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갈수록 그의 눈앞엔 더욱 비옥한 땅이 펼쳐져 있었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당황한 바흠은 젖 먹던 힘을 다해 원래의 지점으로 달려갔다. 마침내 해가 지기 직전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가까스로 출발점에 도착했다. 하지만 해가 서산으로 넘어감과 동시에 가슴을 쥐고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말았다. 그가 차지한 건 고작 한 평 남짓한 자신의 무덤이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가져도 더 탐나고, 누려도 더 누리고 싶다. 게다가 현대인은 결핍의 욕망으로 살아간다. 채우고 채워도 충족되지 않는다. 끝까지 올라가도 끝내 만족이란 없다.
사람이 일상의 행복을 놓치고 불행해지는 것은 다른 데 있지 않다. 뒤를 돌아볼 줄 모르고 더 높은 곳만 쳐다보는 데 있다. ‘조금만 더’ 하는 마음이 이미 얻은 것조차 다 잃게 하거나 무의미하게 만든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카로스는 너무 높이 날지 말라는 아버지의 당부를 무시하고 밀랍으로 만든 날개를 달고 하늘로 날아오른다. 그는 높이 올라갈수록 더 높이 오르고 싶어졌다. “저 태양까지 가보는 거야” 태양에 가까워지자 밀랍이 녹아버려 바다로 곤두박질해 죽고 말았다.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이니 욕망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의 불행은 욕망을 조절하지 못하고 끝없이 오르려는 데서 생긴다. 이카로스가 높이 날되 적당한 선에서 멈추었다면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끝까지 올라가려다가 결국 죽음을 자초하고 말았다.
윗글을 쓴 항해(沆瀣) 홍길주(洪吉周, 1786-1841)는 명망 높은 풍산 홍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머리가 뛰어나 다섯 살이 되기도 전에 팔괘와 오행을 익혔다. 형인 홍석주(洪奭周)는 당대 정승까지 오른 저명한 학자였고 동생인 홍현주(洪顯周)는 정조의 사위였다. 그는 성공할 수 있는 조건을 모두 갖춘 금수저였다. 하지만 그는 출세의 욕망을 누르고 스물여섯 살 이후엔 아예 과거 시험마저 포기했다. 그는 권력 대신에 자신이 좋아하는 문장가의 길을 택했다. 어느 날 마을에 사는 지인(知人)이 자신의 집에 지지당(止止堂)이란 현판을 붙이고 항해에게 기문을 지어달라고 요청했다. 지지(止止)는 멈춰야 할 곳에서 멈춘다는 뜻이다. 『주역(周易)』의 “멈출 곳에서 멈추니 속이 밝아 허물이 없다.[止于止, 內明無殆]”라는 말에서 가져온 듯하다. 항해는 그를 위해 위의 기문을 써 주었다.
위험한 일이라서, 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서 멈추는 일은 그래도 가능하다. 하지만 일이 순조롭게 풀리고 있는데 욕심을 멈추기는 쉽지 않다. 일이 뜻대로 이루어져 승승장구하는 중인데 마음을 비우기는 힘들다. 최고의 자리에 오르면 욕심을 거둘 만도 하건만 그렇지도 않다. 『주역』, 「건괘(乾卦)」에는 항룡유회(亢龍有悔)라는 말이 있다. 항룡(亢龍)은 하늘 끝까지 다다른 용이다. 명예와 권력이 하늘을 찌를 듯이 가장 높이 올라간 단계를 말한다. 공자는 “항룡은 너무 높이 올라갔기 때문에 존귀하나 지위가 없고 너무 높아 교만하기 때문에 자칫 민심을 잃게 될 수도 있으며 남을 무시하므로 보필도 받을 수 없다. 이 때문에 움직이면 후회함이 있다.”라고 했다. 꼭대기까지 오르면 자신이 최고인 줄 안다. 자신이 잘나서 그리되었다고 여긴다. 올챙이 시절은 까맣게 잊고 받는 것에만 익숙해진다. 시키는 대로 주변 사람들이 움직이니 세상이 자기 마음대로 되는 줄 착각한다. 교만과 위선이 하늘을 찌른다. 그러나 달은 둥글고 나면 다시 기울기 시작하고 항아리는 물이 가득 차면 더 이상 물을 담지 못하고 흘러넘친다. 주위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고 종국에는 혼자만 남는다. 끝까지 올라간 용은 반드시 후회한다. 적당한 선에서 그칠 줄 알아야지 끝까지 올라가려다간 자신을 망친다. 지위가 높을수록 겸손이 필요하다.
노자(老子)는 말한다. “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멈춤을 알면 위태롭지 않아 오래갈 수 있다.(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 욕되고 위태로운 길을 가지 않으려면 자신의 위치와 상황을 잘 헤아려야 한다. 자신의 자리를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하고, 자신의 역량보다 조금 모자란 자리에 앉을 줄 알아야 한다. 탐욕이 지나치면 과분(過分)한 행동이 된다. 나의 설 자리가 어디이고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며 내가 가는 길이 어디인지를 잘 아는 것, 이를 수분(守分)이라 한다. 과분이 아닌 수분의 자세가 멈춤의 지혜일 것이다.
세상에는 염치를 버리고 위험함을 무릅쓰면서까지 이익을 좇는 자들이 있다. 천 길의 강물에서 돛대가 꺾여 위태로운 상황이건만 앞으로 나아가기만 할 뿐 물러설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성과주의로 대표되는 물질의 욕망 앞에서 멈출 줄 모른다. 앞에서 우르르 달려가니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작정 앞을 향해 달려간다. 그러나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남보다 빨리 가는 데 있지 않다. 인생의 성패를 결정짓는 것은 내가 어디로 가느냐에 있다. 조급히 뛰던 길에서 멈추어 서서 나의 자리를 점검할 수 있어야 한다. 단번에 멈출 수 있는 현자는 못될지언정 멈추고 또 멈추면서 욕망을 조절할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해 가야 할 것이다.
홍길주는 묻는다. “그대는 위험한 곳을 만나 멈췄는가? 아니면 순탄한 곳을 만나 멈췄는가?”
글쓴이박수밀(朴壽密)
고전문학자
'교육 > 고전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모님을 기억하는 방법 (0) | 2019.10.08 |
---|---|
가을밤의 단상 (0) | 2019.09.25 |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믿음 (0) | 2019.09.11 |
아무리 견고하더라도 (0) | 2019.09.10 |
다시 이순신 (0) | 2019.08.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