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고전의 향기

마음에 꼭드는 날에

백광욱 2019. 3. 28. 06:02




마음에 꼭드는 날에


< 번역문 >

    뜰에 아홉 그루 복숭아나무가 있는데 높이가 처마와 나란하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자 서늘한 그늘을 드리웠다. 아이의 손을 잡고 그 나무 아래로 가 나뭇잎을 따다 붓을 들어 마음 내키는 대로 글씨를 썼다. 해가 저물어 마루로 돌아와 문득 돌아보니 미소가 한번 번졌다. 그제야 비로소 마음에 맞는 일을 하기가 쉽지 않음을 깨달았다. 한평생을 두고 말하더라도 마음에 꼭 맞는 날을 얻기는 매우 힘들다. 좋은 수레를 타고 진수성찬을 먹는 사람도 때때로 근심 걱정은 있기 마련이다. 일 년 아니 한 달에 마음에 딱 맞는 날이 얼마나 될까? 비록 하루라도 마음에 딱 맞기는 참 어렵다. 부럽구나! 세상에 달관한 지인(至人)은 재앙도 근심도 없이 하늘 밖에서 구름처럼 노닐며 마음에 딱 맞게 살아가다가 일생을 마치겠지. 임오년(1762) 6월 21일, 거주하는 집의 첫째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붓 가는 대로 쓰다.

원문

庭有九桃, 長與簷齊. 淸風徐集, 時展凉陰. 手携童子, 於焉其下, 拈筆摘葉, 隨意而寫. 日夕歸軒, 却顧一笑, 始覺適心亦不易得. 合論人生, 得適甚尠. 駟馬鼎食, 有時憂患. 一歲一月, 適者幾何? 况復一日得之斯難. 羡彼至人, 無灾無憂, 雲遊天外, 以適終年. 六月之二十一日, 謾書于寓齋之第一桃樹下, 歲在壬午.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영처문고(嬰處文稿)』 「만제정도(謾題庭桃)」


 
해설

   인생은 남을 먼저 떠나보내다가 종국에는 내가 먼저 떠나가는 것이다. 그 사이에 그윽한 슬픔을 간직한 채 죽음의 두려움을 애써 잊으며 때로는 관계의 상처로 아파하고 때로는 생계 걱정에 잠 못 이루고 때로는 불행한 일을 겪으며 괴로이 살아간다. 간혹 기쁘고 즐거운 일도 있었겠지만, 삶에서 온전히 기뻤던 날은 얼마나 될까?

 

   스물한 살 이덕무의 겨울은 몹시 고되었다. 당시 이덕무는 이사를 자주 다녔는데, 햇볕도 들지 않는 단칸방인지라 방안은 몹시 냉랭했다. 하루는 집 뒤편으로 매서운 바람이 스며들어 등불이 마구 흔들거렸다. 궁리 끝에 이덕무는 『논어』 한 권을 뽑아 바람막이로 삼았다. 임시변통의 꾀가 어느 정도 효과가 있어 자못 뿌듯했다. 다음날 밤에도 찬바람은 어김없이 들이닥쳤다. 입김을 불면 성에가 되고, 이불깃은 차갑게 얼어붙어 버석버석 소리가 났다. 추위에 뒤척이던 그는 『한서』 한 질을 이불 위에 늘어놓아 추위를 누그러뜨렸다.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는 이덕무에겐 혹독한 견딤의 시간이었다. “낙숫물을 맞으면서 헌 우산을 깁고, 섬돌 아래 약 찧는 절구를 안정시켜 두고, 새들을 문생(門生)으로 삼고 구름을 친구로 삼는다.(敗雨傘承霤而補, 古藥臼逮堦而安, 以鳥雀爲門生, 以雲烟爲舊契).”라는 고백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가난과 병치레는 이덕무의 일상이었다.

 

   그런 그에게 살아가는 힘을 준 것은 책이었다. 이덕무는 이른바 책 미치광이였다. 그는 단 하루도 손에서 책을 놓아본 적이 없었다. 덥든지 춥든지 병들든지 건강하든지 오로지 책을 읽었다. 이덕무에게 책 읽기는 삶의 원동력이자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해주는 행위였다. 지극한 슬픔이 몰려와 더 이상 살고 싶은 희망조차 사라질 때, 그를 일으켜 준 것도 책이었다.

 

   슬픔이 닥치면 사방을 둘러보아도 막막해서 그저 한 치 땅이라도 뚫고 들어가고 싶고 살고 싶은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어진다. 다행히 나는 두 눈이 있어 글자를 배울 수 있었다. 한 권의 책을 들고 마음을 위로하다 보면 조금 뒤엔 절망스러운 마음이 조금씩 안정된다. 만일 내가 온갖 색을 볼 수 있다 해도 책을 읽지 못하는 까막눈이라면 장차 어떻게 마음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哀之來也, 四顧漠漠, 只欲鑽地入, 無一寸可活之念. 幸余有雙眼孔頗識字, 手一編慰心看, 少焉, 胸中之摧陷者乍底定. 若余目雖能視五色, 而當書如黑夜, 將何以用心乎?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이덕무가 스물두 살이던 늦여름, 비록 허름한 작은 집이었지만 뜰에는 아홉 그루의 복숭아나무가 있었다. 나무는 모두 처마와 비슷하게 자랐다. 찌는 듯한 더위가 가시고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자 이덕무는 아이의 손을 잡고 그늘진 복숭아나무 아래에 섰다. 나뭇잎을 몇 개 따서 붓으로 내키는 대로 글씨를 썼다. 아이에게도 따라 쓰게 하고, 그림도 그려보게 했다. 나뭇잎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날 이덕무는 아이와 함께 해가 뉘엿해질 때까지 평화로운 시간을 즐겼다. 저물녘 마루에 앉아 아이와 함께한 하루를 생각하니 배시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실로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마음에 딱 맞는 날이었다. 시원한 복숭아나무 아래서 아이와 함께 보낸 참 좋은 날의 하루는 그의 인생에서 잊기 힘든 추억 하나를 새겨 주었다.

 

   그러다가 이덕무는 문득 어떤 서글픔이 몰려왔다. ‘오늘처럼 마음에 꼭 드는 날이 얼마나 될까?’ 세상은 그에게 소소한 일상도 들어주지 않았다. 서얼 출신인 그에게 세상은 차별의 시선을 보냈으며, 학문이 뛰어났음에도 관직의 길을 내주지 않았다. 지독한 가난에 그와 가족들은 잦은 병치레에 시달렸고, 어느 날은 자신이 가장 아끼던 『맹자』를 팔아 쌀을 사기도 했다. 어느 늦은 여름날, 동자와 마음에 꼭 드는 날을 경험한 이덕무는 근심과 재앙에 얽매이지 않는 지인의 삶을 소망했다.

 

    젊은 날의 이덕무는 가난과 병치레로 점철된 삶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난을 부끄러워해 감추거나 가난에 짓눌리지는 않았다. 가난을 죄로 여기게 하는 건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산물일 뿐, 고전 시대 선비들에게 가난은 삶의 충분조건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늘이 우리를 생겨나게 했을 때 이미 가난할 빈(貧)자 한 글자를 점지해 주었으니 거기서 도망할 길도 없거니와 원망할 것도 없습니다.” 이덕무는 가난과 함께 하는 법을 알았고, 그 가운데서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알았다. 나아가 가혹한 삶의 조건을 성장의 동력으로 삼아 약자에 대한 공감 능력을 키웠다. “가난해서 반 꿰미의 돈도 저축할 수 없는 처지였음에도 가난에 시달리는 천하 사람들을 위해 은택을 베풀 것을 생각(貧不貯半緡錢, 欲施天下窮寒疾厄)”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가난 속에서도 자오(自娛)하는 맑은 선비였다.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꾸었던 평화주의자였고, 갈매기와 귀뚜라미를 사랑한 진정한 생태주의자였다.

 

   근래 한 드라마에서, 치매에 걸려 기억을 잃어가는 어머니에게 백발이 성성한 아들이 묻는다. “어머니는 살면서 언제가 제일 행복하셨어요?” 어머니가 대답한다. “대단한 날은 아니고, 나는 그냥 그런 날이 행복했어요. 온 동네에 다 밥 짓는 냄새가 나면 나도 솥에 밥을 안쳐놓고 그때 막 아장아장 걷기 시작했던 우리 아들 손을 잡고 마당으로 나가요. 그럼 그때 저 멀리서부터 노을이 져요. 그때가 제일 행복했어요. 그때가.”

 

   삶은 언제나 고되고 앞날은 늘 근심스럽다. 오늘의 우리는 연애, 결혼, 출산의 세 가지를 포기한다는 3포 세대를 넘어, 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N포 세대라는 말을 들으며 살아간다. 행복한 삶은 사치처럼 들린다. 그러나 행복은 크고 거창한 것에 있지 않다. 세상은 큰 집에 살고 큰 차를 타고 큰 힘을 가져야 행복할 수 있다고 주입한다. 남들이 집어넣은 큰 행복이 아닌, 내 안에서 우러나오는 진짜 행복은 언제나 가까이에 있었다. 다만 그날을 깨닫지 못하고 지나쳤을 뿐이다. 슬플 때는 책을 읽으며 나뭇잎에 글씨를 쓰는 데서 행복을 느낄 줄 알되, 이웃과 사회를 돌아보는 삶을 소망한 이덕무의 삶은 진정한 소확행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글쓴이박수밀(朴壽密)
고전문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