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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평지에 쌓은 성, 낙안읍성의 역사

백광욱 2010. 6. 17.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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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지에 쌓은 성, 낙안읍성의 역사 (02. 07)


새벽에 일어나 여명을 찍으며 기다리니 일곱 시 반쯤 마을 전체에 해 볕이 골고루 비친다.
이제 성곽 위를 돌며 마을 전체를 찍어본다.

순천시 낙안면에 소재한 낙안읍성 민속마을은 넓은 평야지에 축조된 성곽으로 성내에는 관아와 100여 채의 초가가 돌담과 싸리문에 가려 소담스레 옛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옛 고을의 기능과 전통적인 주거공간에서 생활하는 서민의 모습을 통해 오늘날 (현재85세대 229명이 살고 있음)에도 보고 느낄 수 있는 살아있는 전통문화로서, 낙안읍성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대동여지지(大同與地志), 여지도서(與地圖書), 세종실록 지리지(世宗實錄 地理志)에  수록되어 있고  단행본으로서  낙안읍지  읍선생안 합편(邑先生安合編)과 노인당지(老人堂誌)가 있는데, 이들 문헌을 근거로 낙안의 역사를 종합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낙안은 먼 옛날 삼한시대에는 마한(馬韓)의 54국 중 신분활국(臣墳活國)이었으며, 백제시대에는 분차(分嵯), 분사(分沙), 부사(夫沙)라고도 불리운 파지성(波知城)이었고, 통일신라 경덕왕 16년에는 분령군(分嶺郡)으로 조양(兆陽), 충렬(忠烈), 백주(栢舟), 동원(董原) 4개의 속현(屬縣 현 보성군 고흥군 일대)을 가졌다.

고려시대에는 태조 23년(940년)에 양악(陽岳), 낙안(樂安)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 뒤  고려 헌종 9년(1018년)에는  나주부(羅州府)에 소속되었고,  고려 명종 2년(117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뒤에 다시 지군(知郡)으로 승격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세조 12년(1466년)  지군(知郡)에서 군수(郡守)로 고쳤으며  중종 10년(1515년)  군내에서 불미한 사건이 발생하여 현령(縣令)으로 격하되었다가 선조 8년(1575년)에 다시 군(郡)으로 승격하였다.
19세기말까지 낙안 군수는 순천진관병마동첨절제사( 順天鎭管兵馬同僉節制使)를 겸했다.
순종 1년 (융희 2년) 1908년 10월 15일 칙령 제72호로 낙안군이 폐지되면서 순천군 낙안면이 되었고,  1949년 8월 14일  순천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승주군 낙안면이 되었다가  1995년 1월 1일 시군 통합에 의하여 순천시와 승주군이 통합됨으로써 현재의 순천시 낙안면이 되었다.

낙안읍성은 대개의 성곽이 산이나 해안에 축조되었는데 반해, 들 가운데 축조된 야성(野城)으로  외탁(外托)과  내탁(內托)의 양면이  석축으로 쌓여 있는  협축(夾築)으로 이루어졌다는 큰 특징이 있다.
이곳 낙안 평야지에 있는 읍성으로서 연대를 살펴보면 조선 태조 6년(1397년) 왜구가 침입하자 이 고장 출신 양혜공(襄惠公) 김빈길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토성을 쌓고 왜구를 토벌하였다. 그 후 인조 4년(1626년 5월 ∼ 1628년 3월) 낙안 군수로 부임한 임경업(林慶業) 군수가 석성(石城)으로  개축하였다고 전해 오고 있으나  조선왕조실록  세종 편에 의하면  세종6년(1423) 전라도 관찰사의 장계 내용에 "낙안읍성이 토성으로 되어 있어 왜적의 침입을 받게 되면 읍민을  구제하고  군을 지키기 어려우니  석성으로 증축하도록 허락 하소서" 하니  왕이 승낙하여 세종9년(1426) 되던 해에 석성으로 증축하기 시작하였다고 하는 이설이 있다.
성곽의 길이는 1,410m, 높이 4∼5m, 넓이 2∼3m로서 면적 41,018평으로 성곽을 따라 동서남북 4개의 성문이 있었으나 북문은 호환(虎患)이 잦아 폐쇄하였다고 전하여 오고 있다. 동문은 낙풍루(樂豊樓) 남문은 쌍청루(雙淸樓) 또는 진남루(鎭南樓)라고 하고 서문은 낙추문(樂秋門)으로서  성문 정면으로  옹성(瓮城)이  성문을 외워 감싸고 있다.  여장엔 활을 쏠 수 있도록 사방 1尺정도의  총안(銃眼)=사구(射口)가 있고  이 총안 역시  근총(近銃)과  원총(遠銃)으로 나누어 있다. 또 여장이 타구(朶口)로 나뉘어 있고 성곽을 따라가면凸 형의 치성(雉城)이라고 한다.
당초 6곳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4곳만 남아 있다. (일부 복원함) 이 치성은 초소(망루) 역할을 했던 곳으로 좌우로 침입하는 적의 동태를 살피기도 하고 성벽을 타고 오르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축조되었다.

그 동안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특히 6.25사변 이후 많은 훼손을 가져왔으나, 1983년 6월 14일 성과 마을(동내리, 남내리, 서내리)이 국내 최초로 함께 사적지(사적 제302호)로 지정이 되면서 1984년부터 3∼4년에 걸쳐 복원작업이 완료되었다. 여장은 동문(낙풍루), 남문(쌍청루) 주변만 복원된 상태이고, 서문(낙추문) 옆 성곽에도 여장이 복원될 계획으로 있다.

그리고 낙안읍성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조선시대 지방계획도시로서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곳으로  현재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 등재를  신청하고 낙안읍성의 가치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남문에서 바라본 낙안읍성





















서문. 오른쪽 뒤의 계단이 마을 일대가 가장 잘보이는 곳이다.

 

















 







남문. 쌍청루 또는 진남루라고도 한다.





 





이런 과거의 유적지에 가면 자세하게 둘러보고 오는 편인데 이날은 갈 길이 바빠서 대충 둘러보고 왔다.  가장 아쉬운 것은  낙안읍성으로부터  2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금둔사란 절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피는 홍매가 있는데 시간도 없고 날씨도 추워서 피지 않았으리라 생각하고 그냥 와버렸다.

그런데  하루 전인 2월6일 토요일,  낙안읍성내의  매화나무에서  홍매가 피었다는 소식과 그 사진을 찍어서  올린 분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대충 다니다 보니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말았다.  아니면  야생화에 대한  내 열정이 식은 걸까?  이건 앞으로 두고두고 후회할 대목이다. 다음코스는 보성의 대표적인 관광녹차 밭, 대한다원 제2녹차 밭이다.

출처 : chungmyungsan
글쓴이 : 우곡 김덕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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