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사(李匡師, 1705: 숙종31 ~ 1777: 정조1)는 원교(圓嶠)라는 호로 널리 알려졌다. 이 호는 그가 살던 곳의 지명을 따서 지은 것이다. 그는 33세 되던 1737년부터 원교산(圓嶠山) 아래로 이사하여 살기 시작했다. ‘원교’는 ‘둥그재’의 한문식 표현으로서, 현재의 서울 서대문구 천연동ㆍ냉천동ㆍ충현동 일대에 걸쳐있는 야트막한 산을 가리킨다. 안산의 남쪽 줄기로서 금화산이라고도 한다. 이 시기 이광사는 부근에 살던 상고당(尙古堂) 김광수(金光遂, 1699 ~ 1770)와 깊이 교유했다. 김광수는 증조부인 김우석(金禹錫)과 아버지 김동필(金東弼)이 모두 동지사(冬至使)로 북경을 다녀온 바 있는 세가(世家)의 후예로서, 잠시 지방관을 지냈던 것을 제외하곤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골동ㆍ서화 수집과 감상에 몰두하며 생을 보냈다.
이 두 사람이 동호(同好)의 교분을 나누던 정경은, 1743년 여름에 이광사가 지은 「내도재기(來道齋記)」(한국문집총간 221 『원교집선(圓嶠集選)』 권8 수록)라는 글에 자세하다. ‘내도재’라는 명칭이 곧 ‘도보(道甫, 이광사의 자)를 초청하여 오게 하는 서재’란 뜻이다. 김광수는 이곳에 종정(鐘鼎) 고비(古碑)와 기이한 서책을 쌓아놓고 틈만 나면 이광사를 불렀다. 그곳에서 이광사는 김광수가 마련해 둔 중국산 지필연묵(紙筆硯墨)으로 주나라 석고(石鼓)나 한나라의 비갈(碑碣) 등의 옛 글씨를 내키는 대로 모사하곤 하였다. 옆에는 김광수가 손수 피워올린 향이 타고 있었고, 이름난 차와 좋은 술도 구비되어 있었다. 이 둘은 날이 저물도록, 때론 며칠이고 함께 시간을 보냈다. 돌아가자마자 또 생각나 다시 불러오기도 했다. 이광사는 말한다.
“성중(成仲, 김광수의 자)은 세상에 달리 벗이 없고 오직 나 한 사람과 친하다. 나 역시 친구가 없고 오로지 성중과 친할 뿐이다. 사람들이 서로 친한 까닭은 추구하는 바와 취미가 들어맞는 대로 모이기 때문인데, 지금 우리 둘은 완전히 반대되는 성격인데도 유독 친하니 이는 실로 이치에서 벗어난 일이다. 이 점이 이해가 가지 않아 성중에게 물어보니 성중도 그 까닭을 몰랐다. 성중이 나에게 되물었지만 나 또한 알 수 없었다. 나와 성중이 알지 못하니, 세상 그 누가 알 수 있으랴? 나와 성중과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까닭은 아마도 그 밑바탕에 깊이 일치하여 바래지 않는 도(道)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고아한 옛 기물을 매개로 맑은 사귐을 나눈 두 사람의 인연을 잘 보여주는 유물로 김광수의 생광명(生壙銘)을 들 수 있다. 생광명은 살아 있을 때 스스로 지은 묘지명이다. 김광수는 이 묘지명의 글씨를 이광사에게 부탁했다. 이광사는 ‘유명조선 상고자 김광수 생광(有明朝鮮尙古子金光遂生壙)’ 12자의 제목을 전통적인 이양빙(李陽氷) 풍이되 다소 굴곡진 획의 맛이 살아있는 전서(篆書)로 쓴 후, 28구 196자 칠언시로 구성된 묘지명 본문은 행서의 맛이 살짝 깃든 단정하고도 정성스런 해서로 썼다. 연기(年紀)가 없어 언제 썼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정황상 대체로 이 두 사람이 한창 교유하던 시기인 원교의 30대였을 것으로 보인다. 수집가와 서예가로 이름높던 두 명인의 신교(神交)가 어려 있는 아름다운 글씨다.
현재 쓰이는 대표자에 의한 표기는 ‘圓嶠’이나, 원교는 자신의 호를 주로 ‘員嶠’라고 썼다. ‘員’과 ‘圓’은 같은 의미이지만, 員 쪽이 세발솥의 둥근 운두를 가리키는 원의에 더 가깝다. 옛 기명(器皿)의 옛 글씨에 관심이 컸던 이광사의 성향을 엿볼 수 있는 어법이다. 그런데 ‘원교’는 멀리 동쪽 바다 한가운데 있다고 하는 신화 속의 다섯 산인 대여(垈輿), 원교, 방호(方壺), 영주(瀛州), 봉래(蓬萊) 중 하나의 이름이기도 하다. 먼바다에 있는 섬 형태의 이상향은, 보통 다른 버전인 방장(方丈), 영주, 봉래의 ‘삼신산(三神山)’이 더 널리 알려져 있으나, 『열자(列子)』 「탕문(湯問)」 편에 등장하는 ‘오산(五山)’ 또한 이에 대한 최초의 문헌 기록 중 하나이기에 그 의의가 작지 않다. 『열자』의 기록에 따르면, 이 산들은 높이와 둘레가 3만 리, 꼭대기의 평평한 곳이 9천 리이며, 서로 떨어진 거리가 7만 리인데, 그 위에는 금옥(金玉)의 집, 순백의 조수(鳥獸), 불로장생의 열매를 맺는 보옥(寶玉)의 나무가 있고 신선과 성인(聖人)이 살고 있다고 한다. 터무니없고 허무맹랑하지만 동시에 동경과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소재이기도 하다. 둥그재 아래 내도재의 장서 중엔 과연 『열자』도 있었을까? 맑은 친구 상고자와 더불어 바다 위 원교의 신선 부럽지 않은 청아한 취미를 즐기던 원교는, 머지않은 미래에 자신이 돌아올 수 없는 먼 남해의 섬으로 보내져 그곳에서 생을 마치게 되리란 사실을 상상이나 했을까?
50세 이후 이광사의 삶은 급전직하했다. 소론 명문가의 자제였던 그는 51세 때였던 1755년(영조 31, 을해년)에 나주괘서사건으로 촉발된 을해옥사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괘서사건의 주모자 윤지(尹志)의 아들인 윤광철(尹光哲)과 편지를 주고받은 죄로 제주로 유배되었다가 곧 함경도 부령(富寧)으로 이배되었다. 옥사의 와중 이광사가 사사되었다는 잘못된 소식을 들은 부인 문화유씨(文化柳氏)가 자결하는 비극을 맞기도 했다. 1762년에는 부령에서 글과 글씨를 가르치며 선동한다는 죄목으로 진도(珍島)에 안치되었다가 다시 신지도(薪智島)로 옮겨졌다. 신지도는 깨끗하고 흰 모래사장이 끝이 잘 보이지 않을 만큼 길게 펼쳐진 명사십리 해변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떠들썩한 여름 한철을 제외하면 비교적 고즈넉한 섬이다. 지금은 완도와 고금도로 연륙교가 이어져 자동차를 타고 들어갈 수 있지만, 과거엔 육지에서 격절된 절해고도였다. 명사십리에서 약간 들어간 금곡마을의 마을회관 근처에 이광사가 유배 생활을 보낸 집이 아직도 남아있다. (신지도 원교 이광사 유배지. 전남 완도군 신지면 대곡70번길 33) 그는 결국 이 섬을 벗어나지 못하고 이곳에서 1777년 7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신지도 이광사 적거지 전경. 아래 가로로 길게 자리잡은 집이 이광사가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사진은 복원되기 전의 모습으로서, 상공에서 서쪽을 바라보고 찍은 것이다. (드론 촬영: 류인태. 2017년)
보통 사람이라면 실의에 빠져 암울한 세월을 보내다 생을 마쳤으리라. 그러나 이광사의 불굴의 예술혼은 절망의 적거(謫居)를 창조의 산실로 바꾸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글씨를 잘 썼다. 김광수 생광명에서 보듯 단정한 해서와 고기(古氣) 어린 전서도 잘 썼지만, 무엇보다 분방한 초서로 이름을 날렸다. 유배되기 이전부터 그는 이미 명필이었다. 그러나 세상에서 그리고 인생에서 쫓겨나 홀로된 이곳에서 그는 자기 자신을 초극하여 한 발 더 내디뎌 새로운 글씨의 경지로 들어섰다. 이광사는 글씨의 본질로 돌아갔다. 글씨의 본질은 필획이다. 그는 점획의 조형미의 요체를 궁구했다. 젊은 시절 내도재에서 수많은 옛 전적을 탐색하고 필사했던 경험이 든든한 자양이 되었다. 옛 글씨는 수없이 많지만 글씨의 고전 중의 고전은 역시 왕희지가 된다. 왕희지의 스승이라 전하는 위부인(衛夫人)의 〈필진도(筆陣圖)〉에 서예의 요점이 담겨 있다. 왕희지는 이를 보완하는 글(제위부인필진도후題衛夫人筆陣圖後)을 지어 다시 그것을 넘어섰다. 이광사는 위부인과 왕희지의 두 글에 다는 주석의 형식을 취하여 장편의 서예 이론서를 지었다. 신지도로 들어온 지 2년 후인 1764년 6월에 완성한 〈서결(書訣)〉이 그것이다. (흔히 그의 호를 따 〈원교서결〉이라 부른다.) 〈서결〉 앞부분에서 글을 짓게 된 사연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어려서부터 글씨를 배우며 이 점(우리나라에서 글씨를 잘 쓰는 이가 드물게 됨)에 의문을 품고 세속의 필법을 한 번 바꾸고자 하여 위진(魏晉)의 글씨를 연구해서 비로소 획을 운용하는 묘리를 터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헛된 명성이 일찍 퍼져 날마다 글씨를 구하는 사람들로 문 앞이 가득했으니, 급한 요구에 응하느라 대강 쓰지 않을 수 없었던 때가 많았고, 당송(唐宋)의 낮은 경지에 빠졌던 경우 또한 많았다. 51세 이후 북쪽 변방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남쪽으로 이배되느라 객지에서 떠돈 10년 동안, 글씨를 구하는 자들을 사절하고 오로지 옛 법도를 연구하며 마음으로 생각하고 손으로 추구하면서 많은 진전을 이루었으나, 스스로 헤아리기에 아직도 최상의 경지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이미 늙었다. 내 뒤로 또 누군가 있지 않겠는가? 내가 본 서예를 하는 이들 중 큰 성취를 기대하기 쉽지 않은 이가 많았으니, 옛것을 배우지 않음에 그 병폐가 있고, 정밀하게 파고들지 않음에 그 병폐가 있다. 옛것을 배우지 않고서 터득할 수 있는 일이란 없다. 정에 이끌려 도를 저버리며 옛것을 전혀 배우려 하지 않는다는 한탄은 위부인의 시대에도 있었으니, 하물며 지금에 있어서랴? (…) 이제 이 글을 지어 붓을 쓰는 방법과 획을 운용하는 방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는 까닭은, 아침이슬처럼 곧 스러져 버릴 나이가 되어 내가 터득한 비결이 끝내 전해지지 못할까 두려워 어쩔 수 없어서이다. 이렇게 써서 영익(令翊)에게 주니, 너는 마땅히 정성 들여 배워 내가 애써 터득한 바가 끝내 발명(發明)함이 없게 되지 않도록 하라.”
영익은 이광사의 둘째 아들 이영익(李令翊)이다. 서문 격의 이 문장에는 고심참담 성취한 자신의 경지에 대한 자부와 그것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을까 두려워 글을 지었노라는 염려가 가득하여 보는 이의 가슴을 울린다. 이렇게 완성해 낸 〈서결〉을, 글을 지었을 뿐 아니라 그 글씨까지 손수 써냈다. 이론과 실제를 함께 갖춘 〈원교서결〉은 가히 당(唐) 손과정(孫過庭)의 〈서보(書譜)〉에 비견할 만한 서예사의 걸작이다. 이광사의 노력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이때 쓴 것만으로는 미진하다 여겨서, 1768년에는 그 후속편을 이영익에게 쓰게 하고 직접 검토하고 수정을 가하여 후편(後篇)을 완성했다. 이 후편은 상하(上下)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원교서결〉은 1764년에 쓴 전편(前篇)과 후편 상ㆍ하, 모두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원교서결〉 전편 친필본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소장하고 있다. 이영익이 쓴 후편 상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후편 하의 친필본은 현재 소재가 알려져 있지 않다. 한국문집총간 제221집으로 간행된 이광사의 문집인 『원교집선』은 자찬(自撰)의 전편만 수록하고 있지만, 전후편을 모두 모은 별행본 『원교서결』의 전사본(轉寫本)이 간혹 세상에 전하고 있어 그 전체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등 소장)
이광사는 〈서결〉 전편을 최소 한 번 이상 쓴 듯하다. 보물로 지정된 친필본과 글씨가 다소 다른 본이 따로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글씨를 흠모한 누군가가 목판에 새겨 놓은 것을 탑본한 첩장본(帖裝本)이다. 필자가 현재 디지털인문학 및 미술사 연구자와 함께 연구팀을 구성하여 청명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이 글에서 그 일단을 소개하고자 한다.
〈원교서결〉의 글씨가 이룩한 성취는 무엇인가? 나이가 든 후 고전에 대한 연찬을 통해 나아간 그 경지는 원만한 조화의 지취를 띠고 있었는가? 오히려 반대였다. 젊은 시절의 글씨와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그 점획의 조형미에 있었다. 〈서결〉은 구불거리며 꿈틀거리는 획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 동세의 정도와 조형의 양상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광사는 동시대인들이 대체로 인정했던 글씨 조형의 고전적 기본을 오로지 정성스레 파고듦으로써 거꾸로 전례 없는 개성의 경지를 획득했다.
〈서결〉 전편은 위부인 〈필진도〉와 왕희지 〈제필진도후〉를 한 구절씩 이광사가 직접 쓴 뒤 해당 구절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덧붙이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어느 부분에서 그는 왕희지가 한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였다.
“옛날 송익(宋翼)이 이런 글씨(산가지算子와 같이 가지런하고 평평하기만 한 글씨)를 썼다. 송익은 종요(鍾繇)의 제자였는데, 종요가 이를 꾸짖자 3년 동안 감히 종요를 만나지 못하고 잠심하여 글씨를 고쳐 썼다. 그리하여 파획(波畫)을 그을 때마다 항상 세 번 붓의 방향을 바꾸는 삼과절(三過折)의 필획을 그었고 (…)”
이에 대해 부연하면서, 이광사는 글씨를 쓸 때 필획의 조형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이렇게 펼치고 있다.
“삼과절은 단지 파획에 해당하는 필법을 말한 것일 따름이다. 그런데 세상엔 간혹 원문의 맥락을 살피지도 않고 모든 획마다 세 번 굽어 꺾으며 붓을 지나게 하는 경우가 있으니 매우 우습다. 그러나 형세상 붓을 꺾을 수는 없더라도, 항상 꿈틀꿈틀 구불구불한 모습을 지니도록 해야 하며, 활시위처럼 곧게 뻗기만 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왜 그러한가? 글씨는 전서와 예서에 근원을 둔다. 왕희지의 이 말 또한 후대의 속된 글자를 취하기만 함을 경계하고 전서와 예서의 필의를 펼치도록 한 것이다. 옛 전서ㆍ예서는 꿈틀거리지 않는 획이 하나도 없었으며, 긴 획은 십여 차례 굽기도 하였다. 〈석고문(石鼓文)〉과 〈예기비(禮器碑)〉, 〈수선비(受禪碑)〉 등에 이러한 필의가 가장 잘 드러나 있다. 옛사람들이 공연히 기이한 형태를 지은 것이 아니요, 이렇게 해야만 먹이 종이에 깊이 스미어, 대충 그냥 지나가는 획이 하나도 없게 되고, 천박한 뜻이 담긴 획이 하나도 없게 되며, 의기가 마구 뿜어져 나와 변화무쌍한 모습에 다함이 없게 되니, 이것은 반드시 알아야 하는 중요한 도리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신우비(神禹碑)〉와 대전(大篆)으로부터 채옹(蔡邕)과 종요의 글씨에 이르기까지 모두 도리에 어긋나는 글씨를 쓴 것이 된다. 만약 ‘저 꿈틀거리고 구불거리는 획은 전서ㆍ예서에 해당하는 것이요, 해서ㆍ초서는 그렇지 않다’라고 한다면, 이는 글씨에 두 가지 도리가 있게 되는 것이니 글씨를 제대로 아는 언설이 아니다.”
‘꿈틀꿈틀하다’에 해당하는 원문은 ‘힐곡(詰曲)’이다. ‘힐’은 ‘길(佶)’과 통하는데, 굽어있다는 뜻이다. ‘힐곡’, ‘길곡’은 ‘길굴(佶屈)’과 상통하기도 한다. ‘길굴’은 문장을 형용하는 말로 주로 쓰이는데, 어렵고 난삽한 문장을 가리킨다. 난삽하여 파악하기 힘들지만 묵직한 힘을 지니고 있는 문장이다. 그렇기에 힐곡은 아무 이유 없이 굽이치는 것이 아니요, 획이 함장한 힘이 발현될 때 매체의 저항을 받아 나타난 결과가 그런 모양으로 나타난 것이다. ‘구불구불하다’는 번역은 ‘완전(宛轉)’에 해당한다. ‘완전’의 움직임은 ‘힐곡’에 비해 좀 더 크다. 이것은 뒤침이다. 변화의 기운에 따라 방향을 바꾸며 고저억양을 이루는 것이다. 이광사는 모든 획에 ‘힐곡완전’의 모습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왜 그러한가?
이광사는 옛사람이 말했기에 그저 그래야 한다고 했던 것이 아니다. 형태의 주창에는 이유가 필요하다. 위부인과 왕희지에 대한 주석이 끝난 〈서결〉 전편 가장 마지막 부분에서 논의를 정리하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옛사람이 말하길, ‘글씨에서 법도를 얻은 후에는 스스로 그 체제를 바꾸어야 한다. 만일 법도에 집착하여 변화시키지 않으면, 이것을 일러 서노(書奴)라고 한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앞 사람의 자취를 고수하여 끝내 변화가 없도록 하겠는가? 그러나 변화라고 하는 것은 법도를 내다버린다는 뜻이 아니다. 하물며 옛사람을 본받아 그 법도에 들어맞도록 하여 자신의 분수를 다한 후에야 비로소 체제를 변화시킬 수 있음에랴! 소동파와 황정견은 법도에 들어맞지도 분수를 다하지도 못한 채 뱃심 좋게 큰소리만 쳤으니 어찌 옳겠는가? 또한 옛사람은 배움이 지극한 경지에 이르면 스스로 오묘한 운용을 갖추어 변화하고자 하지 않아도 저절로 변화하였다. 이는 마치 조화옹이 사물에 따라 형상을 만들 뿐 애초에 정해진 형체를 두지 않음과 같다. 그러니 서노가 싫어 의도적으로 피하려 고의로 앞 사람의 법도를 없애려 한 것이 아니다. 만약 법도에 들어맞지도 자신의 본분을 다하지도 않은 채 지레 뻐기거나 방자하여 자기를 높이는 마음을 품고 망령되이 변화에 통하려 하면서 곧장 옛 법도를 버린다면, 이는 이른바 의도적으로 변화하려 한다는 것이니 끝내 잘 변화하지 못하게 될 뿐이다. 요새 사람들은 이것이 소동파와 황정견이 도리에 어긋나게 한 말임을 알지 못하고, 그들의 변설이 공부하지 않는 잘못을 변호해줄 수 있다며 좋아하면서, 옛사람의 찌꺼기조차 보지 못한 채 거칠고 조급한 마음으로 자신이 새로운 필의를 창출해냈다고 자평하곤 한다.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서생들이 겨우 종이 몇 권만 쓴 후 곧장 왕희지가 52세 이후 성취한 경지를 지어내며 더 이상 진보를 추구하지 않으니, 훌륭한 재질을 갖추고서도 끝내 성공한 사람이 한 명도 없게 된다. 이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
여기에서 이광사는 옛 법도를 따름과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일이 모두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변화를 추구한다는 것은 옛 법도를 내버림도 아니요, 억지로 추구함도 아니다. 법도를 정확히 이해하여 통달한 후 자신의 가능성을 남김없이 발휘해 내면, 새로운 경지로 다시 나아가 저절로 변화하게 된다. 이는 마치 원래 정해진 바를 두지 않고 자연스레 변화해 나가는 자연의 이치와도 같다. 이광사의 이 논의 안에서, 그가 창출한 꿈틀거리며 구불거리는 획은 고법을 극복한 인위의 극치를 넘어, 변화의 이치를 체현한 자연의 법도로 승화했다.
〈원교서결〉의 진정한 가치는 그 글씨에 있다. 이광사는 자찬의 글로 펼쳐낸 이론을 자필의 글씨로 씀으로써 그 자체로 예술적 실천을 이루었다. 〈서결〉은 넘치는 힘을 눌러 담은 생동하는 획으로 가득하다.
“호위서노(號爲書奴)”의 ‘호(號)’의 마지막 획은 두드러지게 길어 생동하는 동세를 가장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예가 된다. 이 세로획은 길게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 몇 번이고 방향을 바꾸고 있으며, 미세한 연동은 그 횟수를 셀 수조차 없다. 꿈틀거림과 구불거림을 이 정도로 온전히 갖춘 획은 그 유례를 찾기 힘들다. 소동파의 대표작인 〈황주한식시권(黃州寒食詩卷)〉(대만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 소장)에도 긴 세로획이 몇 군데 보인다. ‘위(葦)’와 ‘지(帋)’(紙의 이체자)의 마지막 획이 그것이다. 상당한 길이를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둘 모두 이광사의 ‘호’에 비해 방향 전환의 수가 적다. 더구나 꿈틀거림은 편린조차 보이지 않는다.
▲소동파 〈황주한식시권(黃州寒食詩卷)〉(부분) (대만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北宋蘇東坡書黃州寒食詩卷. 國立故宮博物院, 台北, CC BY 4.0www.npm.gov.tw)
‘일(一)’과 ‘과(過)’ 마지막 획은 〈원교서결〉 가로획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쉽사리 곧장 뻗지 않으며 힐곡하는 이 획은 변화미의 가장 간결한 화신이다. 황정견 또한 물결치는 가로획으로 유명했다. 소동파의 〈황주한식시권〉 뒤에 단 발문(跋文)의 ‘의(意)’의 제5획은 글자의 일상적 범위를 한참 넘어선 길이를 갖고 있는데, 넘치는 힘을 잘 체현한 구불거림을 보이고 있다.
▲(좌)〈원교서결〉 일(一) | (우) 〈원교서결〉 과(過)
▲황정견 〈황주한신시권발〉(대만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北宋蘇東坡書黃州寒食詩卷. 國立故宮博物院, 台北, CC BY 4.0www.npm.gov.tw)
▲(좌) 〈증장대동고문제기〉 정(丁) | (우) 〈증장대동고문제기〉 적(適)
▲황정견 〈증장대동고문제기贈張大同古文題記〉. 미국 프린스턴대학교 미술관(Princeton University Art Museum) 소장. Huang Tingjian(1045–1105), Scroll for Zhang Datong (Zeng Zhang Datong guwen ti ji. Gift of John B. Elliott, Class of 1951 (y1992-22)
장대동에게 준 고문(古文) 앞에 쓴 글(贈張大同古文題記)〉(미국 프린스턴대학교 미술관 소장)의 ‘정(丁)’의 첫 가로획은 매우 특이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즉 획의 윗부분이 비교적 평탄한 표면을 지닌 데 비해, 아랫부분은 파도치듯 넘실거리고 있는 것이다. 같은 글의 ‘적(適)’의 가장 아래에 있는 획은 이와 달리 획 전체가 몇 차례 힘의 방향을 바꾸며 전체적으로 꿈틀거리며 전진하고 있다. 둘 모두 대단한 동세를 체현한 혁명적 획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와 비교해 보면 이광사의 획이 동세의 조형에서 한 단계 더 진보한 것임을 잘 알 수 있다. 힐굴과 완전을 동시에 갖춘 이광사의 긴 세로획과 가로획은 확실히 이 두 송대(宋代)의 대가보다 앞서 있다. 이광사의 자신감에는 근거가 있었다.
이렇게 눈에 띄게 긴 획이 아니어도 〈원교서결〉의 글자들에는 꿈틀거림과 구불거림이 넘친다. ‘즉(則)’의 세로획들은 팽팽히 긴장되어 있으면서도 연동 운동의 떨림을 갖고 있다. ‘변(變)’의 두 糸은 자형 자체의 맥락을 잘 살려 완전(宛轉)하고 있다. 아래의 夊의 ‘丿’의 힐곡 또한 멋지다. ‘세(势=勢)’에서는 첫 3획을 이루는 ‘扌’를 유심히 보아야 한다. 제2획인 세로획 끝에서 제3획으로 넘어갈 때 보이는 허획(虛畫)의 구불거림을 보자. 글자의 구조를 이루는 실획이 아닌 이러한 획조차 이광사는 그냥 넘기지 않았다.
▲〈원교서결〉중에서. (좌) 즉(則) | (중) 변(變) | (우) 세(勢)
이광사가 추구한 변화미는 개별 획과 글자를 넘어 글자들을 넘나들며 화면 전체를 채우는 동세를 지배한다. 위 세 번째 인용문의 마지막을 이루는, 정첩(貞帖)의 네 면(제236~239면)을 보자. 원문의 “法, 是所謂有意於變, 卒爲不善變已矣. 今人不知此爲蘇黃畔道之言, 喜其辨之可以自解不學之過, 以粗心躁意, 未見古人糟粕, 便自謂自出新意. 新學小生, 才寫數卷紙, 便作五十二以後之羲之之事, 更不求進, 良材美質, 竟無一人成”에 해당한다.
▲〈원교서결〉 탁본첩 중에서 (貞帖) (제236, 237면) (개인 소장)
▲〈원교서결〉 탁본첩 중에서 (제238, 239면)
점차 변화의 강도를 더해가던 글자들은 ‘新意’ 이후 폭주하며 2개 면을 내달리고 있다. 이 부분이 〈원교서결〉 전편 조형미의 하이라이트다.
‘新’은 글자의 크기가 갑자기 커져 이후 난장의 신호탄이 된다. 글자 오른편(방旁)의 ‘斤’의 마지막 획은 둥근 호를 그리며 왼쪽 아래로 빠지고 있는데, 꿈틀거리는 연동 운동이 잘 나타나 힘차다. 이 면은 4개의 행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2~4행은 행들 사이 틈입이 심하다. 즉 제2행의 첫 두 글자인 ‘小生’과 제3행 첫 글자인 ‘紙’, 그리고 제3행의 ‘紙便作’과 제4행의 ‘二以後’는 각자의 고유 행간을 비집고 들어와 공간을 공유한다. 제3행과 제4행에서 ‘紙便作五十二以後之’의 글자들은 각기 모두 회전 운동이 훌륭하다. 빙글빙글 이어지며 견아상입(犬牙相入)하는 획들로 인해, 이 부분은 오로지 운동감만으로 가득 찬 화면이 된다. 운동감은 다음 면의 ‘羲之之事 更不求進 良材美質 竟無一人成’에서 더욱 고양된다. ‘羲之’의 ‘之’는 매우 길게 뻗었고 이어지는 ‘之’는 작고 간단히 처리되어 대비된다. 마지막 제4행의 ‘無一人成’은 ‘成’의 마지막 점만 제외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 획으로 그어졌다. 구불구불 이어진 이 일획(一畫)은 마침 이 부분의 원문에서 이광사가 설파하고 있는 궁극의 변화미의 화신이다.
체제가 안정되고 정치는 발전한 조선 후기는 정치 세력간 투쟁, 즉 당쟁이 격화한 시기이다. 당쟁에서 밀려난 지식인들은 격절의 공간 속에 금고(禁錮)되어 강제된 침잠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평생토록 단련하여 내면화된 학문의 내공은 그들을 저술의 길로 이끌기도 했다. 어떤 이는 사회와 체제에 대한 개혁안을 구상하기도 했고, 어떤 이는 경전에 대한 주해를 연찬하기도 했으며, 어떤 이는 새 기운을 지닌 시문을 창작하기도 했다. 이광사는 예술의 본질을 파고들었다.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오롯한 시간을 형식미의 탐구에 쏟았다. 평생 함께한 분야라도 일상의 시간 속에선 반성과 탐구가 쉽지 않은 법이다. 그렇기에 이광사 개인의 불행은 후대의 예술가에겐 축복이 되었다. 그가 남쪽 바다 한가운데의 섬 신지도에서 남긴 〈원교서결〉의 문장과 글씨는 명사십리의 모래알처럼 무궁무진한 조형미의 가능성을 품은 한국 서예사의 보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