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현의 공간을 기리는 단아한 존경
- 곡운 김수증의 포천 옥병동 예서(隸書) 석각
〈이양정 벽에 쓰다[題二養亭壁]〉
〈이양정 벽에 쓰다〉
이따금 산새 소리 짤막히 들려오고
적막한 책상엔 책들만 여기저기
볼 때마다 딱하도다, 백학대 앞 맑은 물이
이 산 벗어나자 흙탕물 되는 것이
題二養亭壁
제이양정벽
谷鳥時時聞一箇 곡조시시문일개
匡牀𡧤*𡧤散羣書 광상적적산군서
每憐白鶴臺前水 매련백학대전수
纔出山門便帶淤 재출산문변대어
*𡧤(적): 고요할 寂(적)의 이체자. 𡧘으로도 씀
- 박순(朴淳, 1523~1589), 『사암집(思菴集)』 권2 칠언절구(七言絶句), 〈제이양정벽(題二養亭壁)〉
사암(思菴) 박순(朴淳, 1523~1589)의 칠언절구 〈이양정 벽에 쓰다〉이다. 이양정(二養亭)은 그가 말년에 경영한 은거의 장소다. 이천(伊川) 정이(程頤)가 『주역』의 이괘(頤卦)의 상(象)을 해설하며 양덕(養德)과 양체(養體)를 이야기한 것에서 이름을 따왔다. 영평현(永平縣) 치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는데, 현재의 포천시 창수면 주원4리 옥병동의 영평천 일대에 해당한다. 이곳에서 종생한 그의 묘소 또한 인근에 있으며, 후대엔 그를 기려 이 자리에 옥병서원이 세워지기도 했다. 장원급제한 인재였던 박순은 선조 치세 초에 14년 간이나 정승의 지위에 있었고, 특히 영의정을 6년 넘게 지냈다. 1585년(선조 18)에 63세의 나이로 사직한 그는, 이듬해부터 158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곳에 은거했다. 박순이라는 인물의 역사적 의의는 단순히 그가 고관을 역임한 데 있지 않다. 어린 시절 서경덕을 사사했던 그는 우계 성혼(1535~1598)이나 율곡 이이(1536~1584)와 깊이 교유했으며, 선조 초에 이들이 등용되고 또 중용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사림(士林) 특히 서인(西人)에게 선진(先進) 문인관료로서 든든한 조력자가 된 것이다. 후대인들은 박순을 정치가보다는 주로 시인으로 기억하였다. 그의 시는 맑고 산뜻한 은거자의 풍치가 있기로 유명했다. 특히 친구였던 운백(雲伯) 조준룡(曺駿龍)을 방문했던 날 밤의 정경을 그린 시 〈조 운백을 방문하여[訪曺雲伯]〉)의 한 구절인 “훌쩍 숲 밖으로 홀로 나섰더니 돌길에 지팡이 소리 울려 자던 새가 알아챘네[翛然獨出脩林外소연독출수림외 石逕筇音宿鳥知석경공음숙조지]”로 시명(詩名)이 오래도록 전해졌다. 〈이양정 벽에 쓰다〉 또한 젊은 시절에 지은 위의 시와 일맥상통하는 면모가 있다. 이양정이 자리한 장소엔 빼어난 경물이 적지 않다. 장소 전체를 압도하는 높다란 벼랑인 창옥병(蒼玉屛)이 우뚝하고, 이양정 주위로도 백학대(白鶴臺), 청학대(靑鶴臺), 산금대(散襟臺), 수경대(水鏡臺) 등 맑은 물 굽어보는 잘생긴 바위가 여럿 있다. 박순은 이들 경물 하나하나에 이름을 지어주며 즐겨 노닐었다. 당대의 명필 석봉 한호에게 글씨를 쓰게 하고 신이(辛夷)란 이를 시켜 바위마다 새기게 하기도 했다. (영평에 은퇴하여 이양정을 짓게 된 경위 및 이양정 주위의 경관은 그의 문집인 『사암집(思菴集)』에 수록된 「이양정기(二養亭記)」란 글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시의 정조는 은퇴한 고관이 경영한 경치 좋은 별서가 주는 통상적 인상과 거리가 멀어 담담하기 그지없다. 〈조 운백을 방문하여〉에서 졸고 있던 새(숙조宿鳥)는 여기에서는 소리 내어 울고 있다. 그러나 그 소리는 간혹 한마디 들려올 뿐이어서 고요를 깨기는커녕 오히려 적막함을 강화한다. 고즈넉한 집엔 책상 위의 책 몇 권뿐이나 은자의 거처에 이 밖에 무엇이 더 필요할까. 백학대의 이름이 등장하여 시의 장소성을 드러내주고 있다. 그러나 시인이 마음 두는 것은 바위 벼랑의 아름다운 경치가 아니다. 앞 시내의 맑은 물 또한 이 선경(仙境)을 지나면 결국 속세로 흘러갈 수밖에 없으리라. 고요를 즐기기만 했던 젊은 날과 달리 한때 국정을 담당했던 늙은 신하는 은퇴했어도 세상에 대한 걱정을 온전히 버릴 순 없었다. 그렇긴 해도 이 시는 은거의 본질인 한가로운 고요함을 잘 그려낸 은거시의 수작임엔 틀림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영평현 조에는 이 지역 출신도 아닌 박순의 시가 3수나 수록되어 있으며, 이 시도 포함되어 있다. 은거라는 행위로 특정 장소를 빛나게 한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현달한 관리로 평생을 보내다 말년에 이르러 은퇴 생활을 누렸던 박순과 달리,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의 인생길은 벼슬보다 산수(山水) 유람과 은거 쪽에 더 치우쳐 있었다. 김수증은 특히 백운산(白雲山) 자락의 곡운구곡(谷雲九曲)의 경영에 열정을 쏟았다. 주희의 무이구곡과 송시열의 화양구곡(華陽九曲)의 모범을 따라 조성한 그곳은, 김수증이 평소 갖고 있던 생각·정념과 예술적 감수성이 집약된 총체적 문예 공간으로서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은거 문화의 장소이다. 경기도 포천군과 강원도 화천군 경계에 자리한 백운산은 지역을 대표하는 큰 산이다. 지촌천을 거쳐 북한강으로 합류하는 곡운구곡의 사탄(史呑) 계곡 반대편에는 또 다른 큰 골짜기인 백운계곡이 있으며 이는 영평천을 거쳐 결국 한탄강으로 흘러든다. 영평천 연변에는 백로주(白鷺州)나 금수정(金水亭) 등 명소가 많지만, 창옥병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창옥병은 박순의 이양정이 소재했던 곳이기에 그 인문적 가치가 더없이 높다. 김수증의 은거의 배경엔 동생 김수흥(金壽興)과 김수항(金壽恒)이 당쟁의 와중에 겪었던 환란이 있다. 그런 그에게 자신이 경영했던 곡운구곡의 진산(鎭山)을 함께한 은거의 선진이자, 자신이 속했던 당색의 선현인 율곡 이이와도 연이 깊었던 사암 박순을 기념하는 일은, 어쩌면 의무에 가까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에 그는 이양정을 찾아가 사암이 자신의 공간을 노래한 제시(題詩)를 재현했다. 사암이 자주 노닐며 직접 제명(題名)한, 석봉 한호의 글씨가 새겨진 수경대 석벽(石壁)이 재현의 장소로 선택되었다. 그리고 재현의 서체로는 곡운이 평소 즐겨 구사했던 예서(隸書)를 썼다. |
▲포천 옥병동 암각문 김수증 예서〈이양정 벽에 쓰다[題二養亭壁제이양정벽]〉 실제 모습 (글씨 크기 18×18cm) (사진 제공: 포천문화원) |
곡운 김수증은 17세기를 대표하는 예서의 대가다. 〈이양정 벽에 쓰다〉 석각은 은거의 선현을 기리는 기념물이다. 김수증으로선 그저 평소에 자주 쓰던 서체를 평심하게 구사한 것일 수 있겠다. 그러나 일견 대단할 것 없어 보이는 이 형식상의 선택은, 예서가 그 기원으로부터 기념물의 서체였음을 감안할 때 문화사적 무게가 더해진다.
진한(秦漢) 교체기를 거치며 폭발적으로 증대한 행정문서의 수요는 예서의 발전을 촉진했다. 기본적으로 금문(金文)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기존의 간독(簡牘) 서체로는 빠른 서사를 감당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소전(小篆)을 중심으로 한 공식 서체는 문서 서사의 편의성을 위해 예서로 발전해갔다. 한대(漢代)에 이르면 간독의 예서체는 일상의 서체로 널리 자리잡게 된다. 일상 속 시간의 누적은 문화적 지위의 상승을 불러왔다. 후한(後漢)의 정치사는 환관을 중심으로 한 황제의 근위 세력과 소위 청류(淸流)로 불린 지역에 기반을 둔 신진 유학자들 간의 대결로 요약될 수 있다. 중앙 정치에서 청류는 당고(黨錮)를 겪으며 주로 패배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시대의 도도한 흐름은 거스를 수 없는 법. 청류의 사상적 기반인 유학(儒學)적 사고는 지역으로 착실히 세를 넓혀갔고, 정치적으로 패배한 청류는 문화적 주류로 성장해갔다. 그 시각적 형상화의 대표적 예가 곧 후한 말에 우후죽순 세워진 비(碑)다. 가문의 내력을 기록하고 공덕을 현창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던 이 비들은 주로 예서로 쓰였다. 이 입비(立碑)의 시기를 거치며 일상의 서체였던 예서는 공식 서체로 우뚝 서 문화의 주류로 편입되었다. 〈을영비(乙瑛碑)〉·〈예기비(禮器碑)〉·〈공주비(孔宙碑)〉·〈장천비(張遷碑)〉 등 후대의 서가들이 즐겨 임모한 아름다운 예서 비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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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漢) 예서(隷書)의 예. 〈을영비(乙瑛碑)〉(왼쪽)와 〈공주비(孔宙碑)〉(오른쪽)의 탁본(부분) 그중에서도 〈조전비(曹全碑)〉는 유려한 붓놀림이 살아있는 우아한 서체로 특히 유명하다. 이 비는 명대(明代) 만력(萬曆)1년인 1573년에 출토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김수증 또한 이 비의 글씨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1673년 계축년에 〈조전비〉의 탁본을 구해 보고 품평한 글이 곧 『곡운집』 권6에 수록되어 있는 「한대 예서 비첩(碑帖) 뒤에 쓰다[書漢隸帖後]」이다. 이 글을 보면 김수증이 한(漢)과 당(唐) 시기 예서 사이의 차이에 대해 분명히 인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그가 예서에 대해 평소 일정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는 〈조전비〉에 대해 “필의(筆意)가 자연스럽고 소산(蕭散) 고아(古雅)한 맛이 있다”고 평하고 있는데, 이러한 미감은 그 자신의 예서에서도 적지 않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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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전비(曹全碑)〉 탁본(부분). 명(明) 초탁본(初拓本) 글씨의 형태미란 측면에서, 해서·행서·초서 등 통행 서체와 전서·예서 등 옛 서체 사이에 놓인 가장 큰 차이는 가로획에 있다. 해행초의 가로획이 우상향 즉 오른쪽으로 갈수록 위로 올라가는 방향성을 띠는 데 반해, 전예의 가로획은 거의 수평을 이룬다. 예서의 경우는 가로획 끝의 마무리가 물결치는 듯한 모양 즉 파책(波磔)이 더해진다. 우뚝 선 석비의 단단한 표면에 새겨진 예서에서, 붓의 느낌이 물씬 살아있는 생동감 넘치는 파책은 조형미의 중심이 된다. 파책은 주로 가로획이나 오른쪽 아래로 비스듬히 내리긋는 획에서 나타난다. 글자 조형미의 중심이 되는 획은 길이가 길어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예서는 글자 전체가 가로 쪽이 더 길쭉한 직사각형의 체세(體勢)를 이루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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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증 예서 석각 〈이양정 벽에 쓰다[題二養亭壁]〉 탁본 (자료 제공: 포천문화원) 여기서 다시 한번 〈이양정 벽에 쓰다〉로 돌아와보자. 한 행에 다섯 글자씩 정연한 배치를 이룬 각각의 글자들 또한 거의 정사각형의 공간을 차지하며 각기 일정한 틀을 고수하고 있다. 이는 예서보다는 해서에 가까운 모양이다. 이렇게 보면, 김수증의 이 글씨는 해서와 예서의 혼종에 가까운 성격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글자 전체의 체세는 해서에 가까우면서, 가로획이 수평을 이루는 경향은 예서에 가깝다. 한편 가로획의 성질 또한 전형적인 예서의 그것과 다소 다르다. 〈조전비〉 등 한비(漢碑) 예서의 가로획이 파책으로 정점을 이루는 강력한 동세가 획 전체에 펴져있는 데 반해, 김수증의 가로획은 수평으로 죽 나가다 끝에서만 마지못해 예서적 맛을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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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예서풍 글씨의 예. 이황(李滉) 〈도산서당(陶山書堂)〉(왼쪽), 송준길(宋浚吉) 〈연평답문발(延平答問跋)〉(부분)(오른쪽) |
▲김수증의 예서. 〈김상용(金尙容) 순의비(殉義碑)〉 탁본(부분)(왼쪽), 〈고산구곡담기(高山九曲潭記)〉(부분)(가운데), 〈취성정화병찬(聚星亭畫屛贊)〉(부분)(오른쪽) 일견 어정쩡해 보이는 이러한 혼종 글씨의 배경엔 조선시대 예서의 역사가 깔려있다. 글씨 특히 예서로 이름이 났던 김수증은 당대의 많은 비문을 예서로 썼다. 그런데 17세기의 김수증이 이렇게 본격적으로 많은 문자(文字)를 남기기 이전, 예서는 그리 널리 쓰인 서체가 아니었다. 퇴계 이황이나 동춘당 송준길의 경우도 예서 필적을 남긴 예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예서들은 본격적인 예서라기보다 그 맛을 차용한 ‘예서풍’의 문자라 칭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할 만큼 초보적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 본격적으로 예서의 장을 열어젖힌 김수증 또한 이러한 초창의 자장에서 자유롭지 못한 위치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초창의 하이브리드가 꼭 미숙을 의미하는가? 김수증이 〈이양정 벽에 쓰다〉에서 구사한 글씨를 보면 오히려 반대임을 알 수 있다. |
▲곡(谷)(왼쪽), 어(於)(오른쪽). 〈조전비〉 중에서 첫 번째 글자인 ‘곡(谷)’은 글자 전체의 짜임이 〈조전비〉와 매우 흡사하다. 그러나 가운데의 긴 가로획에서 미감의 결정적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김수증의 그것은 훨씬 절제된 파책을 갖고 있다. 마지막 글자인 ‘어(淤)’ 또한 삼수변을 제외한 ‘어(於)’를 〈조전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김수증의 ‘淤’는 짧은 3개의 가로획이 극단적으로 강조된 모습이다. 이로 인해 기본적으로 예서의 짜임을 갖추고 있되, 획의 율동미를 가진 〈조전비〉에 비해 훨씬 정돈된 모습을 갖는다. 예서 필획의 맛은 마지막 획의 형해화된 파책에 그 흔적만을 남기고 있다.
둘째 줄 두 번째 글자인 ‘개(箇)’와 세 번째 글자인 ‘광(匡)’은 김수증 예서 조형미의 고갱이라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정방형을 띠는 자형으로 인해 글자가 품고 있는 ‘囗’과 ‘匚’의 형태는, 해서도 예서도 전서도 아닌 기묘한 균형을 취한다. 대죽머리(𥫗)와 ‘匚’ 마지막의 약한 파책만이 이 글씨가 예서임을 증거하는 신분증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 ‘箇’와 ‘匡’의 정방형 자형과 정돈된 획이 갖는 강력한 균제미는 김수증 예서 특유의 단정한 미감을 이루는 강한 기반이 된다. 기본적 정체성은 예서이면서도 예서적 맛이 부족하다는 약점을 보족하기 위해, 김수증은 고문자 즉 전서적 요소를 도입하여 고의(古意)를 보강했다. 첫 번째 줄 마지막의 ‘문(聞)’에서 ‘門’은 각 문짝이 ‘호(戶)’처럼 보이게 처리했다. 전서에서 흔히 쓰는 자형이다. 옛 맛의 정점은 다섯 번째 줄 4번째 글자인 ‘산(山)’일 것이다. 퇴계 이황의 〈도산서당(陶山書堂)〉 편액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러한 상형적 요소의 도입은, 글씨가 고풍(古風)을 띠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둘째 줄 마지막 글자인 ‘적(𡧤)’은 ‘적(寂)’의 이체자이다. 이 글자는 거의 쓰이는 일이 없는 벽자이다. 비슷한 모양의 ‘𡧘’이 초사(楚辭)에서 쓰인 예가 있으나, 이 또한 벽자이긴 마찬가지다. 이러한 난해자(難解字)의 도입은 균제미 일변도의 화면에 파격의 재미를 선사한다. 다소의 변주가 있긴 하나, 김수증의 이 글씨는 전편에 걸쳐 일관된 기조를 갖고 있다. 정방형의 자체(字體), 수평의 횡획, 그리고 절제된 파책이 그것이다. 이 일관성은 균제의 미감을 준다. 예서 특유의 변화미가 없는 장법(章法, 화면 전체의 글자 배치) 또한 이를 강화하고 있다. 엄격한 균제미와 유려한 파책은 우아함의 인상을 준다. 이는 은자의 소박한 삶과 다소 어울리지 않는 면모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작품 전반에 강력히 흐르는 단아함의 미감은 이러한 단점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다. 고결한 은거의 선현에 대한 숭모의 정엔 한 점의 거칢이나 잡스러움도 있을 수 없다. 김수증의 예서로 인해 이 석각은 원래의 소박한 은자의 시정(詩情)에 단아한 존경과 유려한 변용의 형식을 더해 갖춘 종합 예술로 승화했다. 포천 이양정 유허의 수경대 석벽에서 이 글씨는 오늘도 흘러가는 영평천 냇물을 굽어보고 있다. 이 석각이 있는 한 은자의 유산을 적시며 흐르는 저 물은 영원히 흐려지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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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를 제공해주신 포천문화원에 감사드립니다.
*참고 문헌:
포천 옥병동 암각문 김수증 예서 〈題二養亭壁〉, 사진 및 탁본, 포천문화원
〈乙瑛碑〉 탁본.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관리번호: TB-1349)
〈孔宙碑〉 탁본. 東漢孔宙碑銘及陰碑,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청구기호: RD03999)
〈曹全碑〉 탁본. 明初拓東漢曹全碑, 대만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등록번호: 新00045355)
宋浚吉 〈延平答問跋〉, 수원박물관 소장 (『書風萬里-조선서예 오백년』, 2020수원박물관 특별기획전 도록, 수원박물관, 2020, pp.118~120)
〈金尙容 殉義碑〉, 인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소재. 탁본 (『한국금석문대계』 권5, 조동원 편, 원광대학교출판국, 1988. p.253)
〈高山九曲潭記〉, 『육일첩(六一帖)』 제4책,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소장품번호: 덕수2932-6)
〈聚星亭畫屛贊〉, 聚星圖, Harvard Yenching Library (도서번호: TK 6177 5642)
유지복, 「『金石集帖』 碑文의 隷書 연구」, 『민족문화연구』96, 2022,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pp.119~154
이희순, 「朝鮮時代 隷書風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석사학위논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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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윤성훈
한국고전번역원 원전정리실 연구원
한국고전번역원 원전정리실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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