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고전의 향기

화를 내면 나찰 지옥에 떨어진다

백광욱 2024. 6. 24. 00:05

 

화를 내면 나찰 지옥에 떨어진다

-대승불경이 조선 유학자의 문집에 실리기까지

 

『법화경(法華經)』은 고타마 싯다르타의 40년 설법을 집약하는 정수를 담고 있는 경전으로서 『반야경(般若經)』, 『유마경(維摩經)』, 『화엄경(華嚴經)』과 함께 초기에 성립된 대승불교 경전이다. 원문은 네팔에서 산스크리트어로 쓰였다고 알려져 있고 동아시아에는 구마라집(鳩摩羅什)이 한자로 번역한 뒤로 본격적으로 알려졌다.

 

  『법화경』 중 관음 사상의 근원이 되는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이 있다. 이 품은 중생들이 여러 가지 고뇌를 받을 때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온 마음으로 부르면 관세음보살이 모두 해탈케 한다는 내용인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만약에 백천만억 중생이 금, 은, 유리, 차거, 마노, 산호, 호박, 진주와 같은 보배를 구하기 위해 대해(大海)에 들어갔을 경우, 흑풍(黑風)이 배를 몰아 나찰 지옥에 떨어트리더라도 그 중 한 사람이 관세음보살을 부른다면 이 모든 사람들이 즉시 벗어나리라.*

*若有百千萬億衆生,爲求金、銀、琉璃、車璖、馬瑙、珊瑚、虎珀、眞珠等寶,入於大海,假使黑風吹其舩舫,飄墮羅剎鬼國,其中若有,乃至一人,稱觀世音菩薩名者,是諸人等皆得解脫羅剎之難。” 

 

흑풍(黑風)은 바다에서 부는 폭풍이다. 아마 오늘날 인도 동부 지방에서 발생하는 사이클론과 같은 태풍이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바다는 인간에게 풍어(風魚)와 폭풍을 동시에 주는, 다스릴 수도 예측할 수도 없는 곳이었다. 바다는 언제나 숭배와 경외의 대상이었고 바다에 의지하여 사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미신을 굳게 믿고 있다. 따라서 바다 한 가운데서 폭풍우를 만나 죽음이 코앞일지라도 “관세음보살” 한 마디에 벗어난다는 경전의 말은 그만큼 간절하고 철석같이 믿어야 한다는 비유적인 표현일 것이다. 이 폭풍과 나찰 지옥의 에피소드가 중국에 와서는 다음과 같이 변주된다. 당대(唐代) 선사(禪師)들의 일화들이 담긴 『조당집(祖堂集)』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실려 있다.*
*紫玉和尚嗣馬大師,在襄陽。師諱道通,未睹實錄,不決生緣。襄陽廉師于迪相公,處分界內,凡有行腳僧捉送,無有一僧得命便殺。如是得無數。師聞此消息,欲得去相公處,衆中覓人隨師,近有十來人。師領十人,恰到界首,十人怕,不敢進,師猶自入界內。軍人見師來,便捉,著枷送上。師著枷到門外,著納衣便上廳。相公按釰大坐,便云:“咄!這阿師,還知道襄陽節度使,斬斫自由摩?”師云:“還知道。法王不懼生死摩?” 相公云:“和尚頭邊還有耳摩?”師云:“眉目無障㝵。貧道與相公相見,有何障㝵?” 相公便拋卻釰,著公衣服,便禮拜問:“承教中有言‘黑風吹其舡舫,漂墮羅剎鬼國’,此意如何?”師便喚于迪,相公顏色變異。師曰:“羅剎鬼國不遠在。”又問:“如何是佛?”師喚于迪,相公應喏。師云:“更莫別求。”相公言下大悟,便禮爲師。
 
  마조 도일(馬祖道一)의 법을 이은 자옥 도통(紫玉道通)이 양양(襄陽)에 머물렀는데, 당시 절도사(節度使)인 우적(于迪)이 불교를 배척하여 행각승(行脚僧)을 보는 즉시 죽이라고 명을 내린다. 자옥 선사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그를 만나 담판을 지었다. 몇 마디 대화 끝에 우적이 다음과 같이 물었다.
  “경전에서 ‘폭풍이 배를 불어 나찰 지옥으로 떨어뜨린다.’라고 하였는데, 이게 무슨 뜻입니까?”
선사가 부르기를,
  “우적아.”
하니, 상공의 얼굴빛이 변하였다. 이에 선사가 말했다.
  “나찰 지옥이 멀리 있지 않느니라.”
상공이 또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선사가 부르기를,
  “우적이여”
하여, 상공이 대답을 하자, 선사가 말했다.
  “다른 곳에서 구하지 말라.”
상공이 이 말에 크게 깨달아 절을 하고 스승으로 모셨다.
 
  텍스트로는 구분할 수 없지만 관찰사의 반응을 보건대, 자옥 선사가 첫 번째로 관찰사의 이름을 불렀을 때는 화를 내는 말투였을 것이고, 두 번째로 이름을 불렀을 때는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뒤 자상하게 불렀을 것이다. 분노하면 내 마음이 지옥이 되고 평온을 찾으면 부처가 된다. 원전에서 언급한 관세음보살의 가피력과 신화적인 색채는 사라지고, 극락과 지옥은 지금 내 마음에 따라 즉시 구현된다는 개개인의 심리 상태 변화로 귀결된다. 이 일화는 “평상심이 도이다.[平常心是道]”를 종지(宗旨)로 삼은 선종(禪宗)이 불경을 어떻게 해석하였는지 그 일단면을 보여준다. 또한 『천중기(天中記)』 『오등회원(五燈會元)』, 『선문염송(禪門拈頌)』 등에도 전사(傳寫)되며 유명한 일화로 자리매김한다. 주인공의 명칭도 자옥 도통은 불공 삼장(不空三藏) 혹은 약산 유엄(藥山惟儼)으로, 우적은 이고(李翶) 혹은 어조은(魚朝恩)으로 조금씩 바뀐다. 
 
  자옥 도통이 흑풍과 나찰을 인간의 분노로 탈바꿈한 뒤 이 이야기는 유학자들이 인용하기 시작한다. 유학에서도 분노는 상황에 맞게 발현하는 것은 괜찮지만 지나치거나 상황에 맞지 않는 경우는 경계하였다. 『주역(周易)』에서는 욕심과 성냄을 누르는[窒欲懲忿] 것을 중요하게 여겼고, 공자는 엉뚱한 사람에게 화를 내지 않는 점에서 제자 안연을 높이 평가하였으며, 『대학』에서도 “마음에 분노가 있으면 마음을 바르게 할 수 없다.[心有所忿懥則不得其正]”라고 하였다. 대표적으로 송대 진덕수(陳德秀)는 〈화보(和父) 양대동(楊大同)이 보시할 목적으로 간행한 보문품에 대한 발문〉에 이 일화를 수록한다. 여기서는 우적과 자옥 선사는 이고와 약산 선사로 나온다. 
 
이고가 어느날 약산 선사에게 “『법화경』 「보문품普門品」에서 ‘거센 폭풍이 배를 몰아 나찰 지옥에 떨어트린다.’라고 했는데 무엇이 거센 폭풍입니까?”라고 물으니, 선사가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이 멍청한 놈. 그런 건 물어서 무얼 하려고?”라고 하였다. 이고가 발끈해서 크게 화내자 약산 선사가 웃으면서 “화내는 마음이 바로 ‘거센 바람이 배를 몰아간다.’라는 경우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면 이욕이 치성하면 큰 구덩이에 빠지게 되고 탐닉에 빠지면 고해에 빠지는 것이 되니, 한 생각이 청정하면 뜨거운 불도 못이 되고, 한 생각이 깨달으면 배는 피안에 도착한다.*
*余自少讀《普門品》, 雖未能深解其義,然嘗以意測之,曰:“此佛氏之寓言也。” 昔唐李文公問藥山禪師曰:“如何是黒風吹船飄落鬼國?” 師曰:“李翺小子,問此何爲?” 文公怫然怒形於色,師笑曰:“發此瞋恚心,便是黒風吹船飄落鬼國也。” 吁,藥山可謂善啓發人矣。以是推之,則知利欲熾然,卽是大坑,貪愛沉溺,便爲苦海。一念淸淨,烈熖成池,一念警覺,船到彼岸。 《西山文集 卷34 跋楊和父印施普門品》 

  「보문품이 관세음보살의 가피력에 대한 내용임에도, 진덕수는 그런 괴력난신적인 허무맹랑함보다 약산 유엄과 이고가 나눈 문답에 더 치중하여 이 책이 화를 가라앉히는 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고 여겼다.

  이 내용은 조선에까지 전해진다. 조선 중기의 문신 이준(李埈)은 〈자경8수(自警八首)〉 중 제분(制忿)편 시구에서 “약산(藥山)의 경계를 그대는 모르는가? 지옥을 표류하는 게 한 순간이라네[藥山有戒君知否? 鬼國漂船一瞥間.]”라고 하였고, 구한말 유학자 곽종석(郭鍾錫)은 〈인도혹문(人道或問)〉이라는 글에서 “인심과 도심을 배에 비유하자면 (생략) 간혹 중간을 지나자마자 태풍이 몰려와 배를 기울이고 삿대를 부러트려 운남을 표류하다가 나찰로 떨어지게 되는 경우는 인심의 기가 이치를 거슬러 악행을 저지르는 경우이다.[其或纔過中流, 颶來颮颮, 傾艙而折槳, 漂雲南而墮羅刹者, 人心之氣, 逆而爲惡也.]”라고 하여 흡사 운남보다 먼 해외 이방(異邦)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화는 사람이 외부의 위협에서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내는 원초적인 감정이다. 외부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앞서 언급한 나찰 지옥과 같은 상태를 초래한다. 그렇기에 이를 빨리 밖으로 배출해야 마음이 편안해진다. 야생 동물과 달리 인간은 사회적 관계망에서 유래한 우열과 비교가 화를 촉발하는 요소이기 때문에 함부로 화를 낼 경우 공동체와 자신에게 심각한 타격을 남긴다. 그렇다고 해서 화를 무작정 참는 것이 해결책은 아니다. 화는 압력밥솥 속의 증기와 같아 억누르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터지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화를 내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이 역설하였으며, 유가나 불가에서도 심성 수양의 핵심으로 자리 잡는다.
 
  붓다는 화가 나면 들숨과 날숨을 세는 수식관(數息觀)을 제시하였고, 공자는 화가 나면 이후의 곤란해질 경우를 생각하라[忿思難]고 말하였다. 공통점은 화가 일어나는 틈을 잘 파악해서 잠시 멈추는 순간을 가진다는 것이다. 다른 면에서 보자면 불가에서는 화를 해소하는 데 중점을 둔 반면 유가에서는 우선 당장 올라오는 화를 이성적으로 누르라고 한다. 이는 불가는 속세와 거리를 둔 수행자를 위한 말이고, 유가는 사회적 관계를 염두에 둔 데서 온 차이점일 것이다. 
 
  옛날에는 개인의 감정보다 공동체를 우선시하는 사회였다. 그래서 공동체의 행복을 위해 개인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였다. 오늘날은 개개인이 건강해야 공동체도 건강하게 유지된다는 점이 대두되다 보니 개인의 감정 표현이 훨씬 자연스러워졌다. 하지만 개개인이 감정을 세련되게 표현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무지한 실정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 각종 매체에서 감정 다루기, 마음 챙김 등에 대해 깊고 다양하게 다루고 있는 것도 우발적 범죄나 진상짓 등 화를 참지 못한 행동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AI의 발달로 지식의 습득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지고, 대신 인간이 갈등 없이 사는 방법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불만스러움을 차분하게 전달하고, 실수에 대해 명백하게 사과하고, 법은 사회적 공분을 충분히 반영하는 사회가 앞으로 한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일 것이다.

 

글쓴이   :  이도현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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