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설
오늘 산중에는 눈보라가 사나운데
그대 사는 차디찬 강가는 또 어떠하려나
초가에서 홀로 가을 지난 낙엽 태우고
외딴 배에서 밤 되어 물고기 잡으리라
숲을 멀리 보니 오솔길 보이지 않는데
십 리 멀리에서 어떻게 편지 받아 볼까
산음에서 오다가 작은 배 돌리지 말게
벗이 쓸쓸하게 조용히 지내고 있으니
今日山中惡風雪금일산중악풍설
一寒江上復如何일한강상부여하
白屋獨燒秋後葉백옥독소추후엽
孤舟應得夜來魚고주응득야래어
千林極望無行逕천림극망무행경
十里何由見尺書십리하유견척서
莫向山陰回小棹막향산음회소도
故人搖落正端居고인요락정단거
- 신광수(申光洙, 1712~1775), 『석북집(石北集)』 권3 「대설기경삼(大雪寄景三)」
< 해 설 >
1월 9일 수도권 전역에 대설주의보가 내렸다. 다행히 기상예보처럼 많은 양의 눈이 오지 않고 기온도 그리 낮지 않아 도로가 빙판이 되지는 않았지만, 회사에서는 이른 귀가를 종용하는 안내 방송이 울리고 아이들도 빨리 집에 돌아오라는 재촉 전화를 연신 해댔다. 대설이 내리면 젊은 사람들은 출퇴근 길의 교통 정체를 가장 먼저 걱정하고 나이 드신 어른들은 빙판길 낙상 사고를 가장 먼저 염려한다.
하지만 시의 작자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대설이 내리면 산중은 고립되기 때문에 낮에도 밖을 드나들기가 힘들고 밤에는 아예 밖을 나설 엄두를 내지 못한다. 꼼짝없이 산중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작자는 강가에 사는 벗을 무척이나 그리워하고 있다.
이 시의 수신자인 경삼(景三)은 작자의 친한 벗인데, 관직 생활을 하지 못해 강가 집에서 은거하며 가난하게 살았던 모양이다. ‘백옥(白屋)’과 ‘고주(孤舟)’의 시어가 그의 생활상을 말해 준다. 산중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자신의 신세와 달리 강가에서 낙엽을 태우고 배 타고 낚시하며 자유롭게 왕래하고 있을 경삼을 상상하며 몹시 그리워한다. 작자는 이 그리운 마음을 편지로 주고받고 싶었지만, 눈 앞에 펼쳐진 숲을 보니 눈보라가 휘몰아쳐 밖으로 통하는 길은 전혀 보이지 않고 또 서로 간에 십 리나 멀리 떨어져 있다. 인편을 구하기도 힘들고 직접 찾아가기도 힘든 상황이다. 하지만 경삼은 강가에 살아 배를 타고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다. 그래서 산음(山陰)의 고사를 사용하여 자신은 가지 못하니 경삼에게 직접 찾아와 달라고 간절히 부탁한 것이다.
산음의 고사는, 진(晉)나라 왕휘지(王徽之)가 산음에 살 때 갑자기 섬계(剡溪)에 사는 벗 대규(戴逵)가 보고 싶어 즉시 작은 배를 타고 밤새도록 찾아갔다가 정작 문 앞에 이르러 대규를 만나보지 않고 그냥 돌아왔던 고사로, 벗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표현할 때 자주 등장한다. 마지막 구의 ‘요락(搖落)’과 ‘단거(端居)’의 시어가 말해 주듯 작자도 형편이 좋지 않고 외롭게 지내는 신세였다. 게다가 바로 얼마 전 경삼과 눈 내리는 밤에 같이 그의 거처에서 시간을 함께 보낸 일이 있었다. 그러니 더 그리울 수밖에.
꼭 눈 내리는 날 밤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누군가를 사무치게 그리워한 적이 얼마나 있었던가. 요즈음은 갖가지 볼거리나 들을 거리의 홍수 속에 마음이 쏠려서 정작 자신의 소중한 사람에게는 마음이 덜 가는 게 현실이다. 마음은 발이 없어서 수천 수만 리를 아주 짧은 시간에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데도 말이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글쓴이 : 최이호
조선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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