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밥과 까마귀
자리에서 일어나 한가로이 걷노라니
산이 깊어 누가 다시 이 길을 지났으랴!
산그늘은 온통 안개 낀 듯 어둑한데
숲속 눈은 절로 꽃으로 피었구나.
괴이해라! 소나무는 바위에 서려 늙어가고
가련해라! 부처는 암자 벽화 속에 많구나.
종 울리니 절밥이 다 됐나 보다
까악까악 까마귀들 쪼아대는 걸 보니.
睡起吾閒步 수기오한보
山深誰復過 산심수부과
峰陰渾欲霧 봉음혼욕무
林雪自開花 임설자개화
石怪盤松老 석괴반송로
菴憐畵佛多 암련화불다
鐘鳴齋飯熟 종명재반숙
啼啄有寒鴉 제탁유한아
- 박태관(朴泰觀, 1678~1719), 『응재유고(凝齋遺稿)』 권상 「관음사에서[觀音寺]」두 번째 수[其二]
이 시를 쓴 분은 박태관(朴泰觀; 1678~1719)입니다. 박태관은 자(字)가 사빈(士賓)이고 호(號)는 응재(凝齋) 또는 백애자(白厓子)며, 본관은 반남(潘南)입니다. 박태관은 백악시단의 일원으로 스승 김창흡으로부터 극찬을 받았으며 이병연, 정선, 홍세태, 정래교 등 당대 명사들과 교유했습니다. 시선집 『응재유고(凝齋遺稿)』가 전하는데 벗이었던 이병연이 자신의 녹봉을 덜어 간행해주었습니다. 박태관은 김창흡으로부터 시가 예스럽고 질박하며 꾸밈이 없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이 작품은 원래 두 수로 이루어진 연작시인데, 그 가운데 두 번째 수를 가져왔습니다. 박태관은 관음사라는 절에 들러 스님과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이른 새벽에 홀로 산책에 나섭니다. 수련에서 “자리에서 일어나 한가로이 걷노라니, 산이 깊어 누가 또 이 길을 걸었으랴!” 라고 하였듯, 박태관의 산책은 아무런 흔적도 없는 새벽 첫눈을 밟는 산책이었습니다. 그리고 함련에서 보듯, 산책을 하노라니 안개가 낀 듯 어둑한 산길에는 가지마다 눈꽃이 피어있습니다. 시인은 좀 더 길을 걷습니다. 가다 보니 노송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 노송은 하얀 눈을 인 채 차디찬 바위에 기기묘묘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도착한 암자에는 벽에 부처님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하얀 눈 속에 무방비로 서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가련해라!’ 라고 한 것입니다. 인적 하나 없는 순백의 세상, 그 안에 노송과 부처, 그리고 시인이 있습니다.
이 시의 묘미는 미련에 있습니다. 순백의 세상, 청정무구의 세계에 빠져 있던 작가에게 홀연 종소리가 들립니다. 아마도 아침 식사를 알리는 종이겠지요. 종소리를 따라 선문에 들어서려는데 어디선가 까마귀들이 날아와 너무도 익숙하게 부리로 쪼아대며 울고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시인은 아름다운 생각을 피웁니다. 아침 공양을 알리는 종소리를 까마귀가 알고서 모여들었다고 말입니다. 사실 시인이 본 장면은 우연한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시인의 생각은 까마귀들이 종이 울리면 으레 절에 와서 아침밥을 공양받았던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빼어난 시적 상상입니다. 순백의 세상에서 스님과 까마귀가 아침 공양을 함께 하는 모습. 시인은 눈 내린 절집의 한 장면에서 나[我]와 저[彼], 사람[人]과 사물[物], 속(俗)과 선(禪) 등 일체의 차별이 무화(無化)된 진여(眞如)의 세계를 읽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잠깐만 빌린 지구
우리는 이 지구를, 우리가 사는 동안만 빌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잠깐 빌린 것을 마치 우리의 소유인 것처럼 함부로 사용합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 남에게 빌리지 않은 것이 또 뭐가 있다고 하겠는가. 임금은 백성으로부터 힘을 빌려서 존귀하고 부유하게 되는 것이요, 신하는 임금으로부터 권세를 빌려서 총애를 받고 귀한 신분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식은 어버이에게서, 지어미는 지아비에게서, 비복(婢僕)은 주인에게서 각각 빌리는 것이 또한 심하고도 많은데, 대부분 자기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처럼 여기기만 할 뿐 끝내 돌이켜 보려고 하지 않는다. 이 어찌 미혹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다가 혹 잠깐 사이에 그동안 빌렸던 것을 돌려주는 일이 생기게 되면, 만방(萬邦)의 임금도 독부(獨夫)가 되고 백승(百乘)의 대부(大夫)도 고신(孤臣)이 되는 법인데, 더군다나 미천한 자의 경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오래도록 차용하고서 반환하지 않았으니, 그들이 자기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겠는가.”라고 하였다. 내가 이 말을 접하고서 느껴지는 바가 있기에, 차마설을 지어서 그 뜻을 부연해 보았다 .
위 인용문은 고려 문인 이곡(李穀)의 <말 빌린 이야기[차마설(借馬說)]>의 일부로, 말을 빌린 자기 경험을 빌어 인간의 존재 양상을 명철하게 꿰뚫어 본 대목입니다. 사실 인간이란 존재는 관계를 통해 사회적 기능을 보증받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 것처럼 무엇 하나 남에게 빌리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곡이 말한 ‘빌림’은 관계 자체를 의미합니다. 저 임금으로부터 미천한 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는 관계에 기반하여 기능을 빌린 것일 뿐인데, 그 빌린 것이 오래되면서 빌렸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하고 본래부터 자기가 소유했던 것처럼 착각하고 맙니다. 이곡이 명철하게 보여준 이런 사유는 오늘날 우리와 우리가 살아가는 터전인 지구와의 관계에도 딱 들어맞는 생각입니다.
잠시 빌린 것일 뿐인 지구를 본래부터 우리 것인 줄로 착각하고 마음대로 써버린 결과, 지구의 모든 존재들이 살 곳을 잃고 시름시름 앓고 있습니다. 인간이 자기 종족만을 위해 이기적 행보를 지속한다면, 결국 인류의 미래도 사라지고 말지도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박태관이 우리에게 보여준 모습, 순백의 눈을 배경으로 아침밥을 나누는 스님과 까마귀의 모습은 우리가 이 지구와 어떻게 공존, 공생해야 할지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글쓴이 : 김형술
전주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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