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노래
< 번역문 >
무릇 역사란 사실에 대한 기록을 의미하니, 임금의 언행과 시사(時事)의 잘잘못을 쓰는 것은 사신(史臣)의 직임이고 명산대천과 도로의 원근을 기록하는 것은 외사(外史)의 소임이다. 그런데 이른바 옥계시사라는 것에 이르러 ‘시(詩)’에 ‘역사[史]’라는 이름을 붙였으니, 이는 어째서인가. 바람·비, 이내·구름, 날짐승·들짐승, 풀·나무 및 거문고·바둑, 붓·벼루, 술·단술, 차·과실과 같은 것들에 대해 무엇을 만나더라도 그 실정을 묘사하고 기록하지 않음이 없으니 그렇다면 이를 두고 시의 역사라고 말하더라도 가당할 것이다. 아아, 송석 선생이 옥계에 살면서 문학과 역사를 스스로 즐기니, 인근에 사는 뜻을 함께하는 선비들이 날마다 커다란 소나무와 오래된 바위 사이를 함께 오가며, 만나면 반드시 시를 지었고 시가 또 권을 이루었다. 이것이 옥계시사를 지은 이유이다.
원문 |
夫史也者。紀實之謂也。書人君言動時事得失。史臣之職也。記名山大川道里遠近。外史氏之任也。至於所謂玉溪詩史者。以詩謂史。此何也。若其風雨烟雲鳥獸草木與夫琴棋筆硯酒醴茶果。無往不觸物而寫其情。遇景而錄其實焉。則雖謂之詩之史亦可也。嗚呼。松石先生居玉溪上。以文史自娛。鄕隣同志之士。日相與往來於長松老石之間。會必有詩。詩又成卷。此詩史之所以作也。
-박윤묵(朴允默, 1771~1849), 『존재집(存齋集)』23권, 「옥계시사서(玉溪詩史序)」
< 해설 >
한양의 인왕산 아래 옥류동(玉流洞)에 소나무, 바위와 어우러져 경관이 빼어난 곳에 집 한 채가 있었다. 이곳은 송석원(松石園) 천수경(千壽慶, 1758~1818)의 거처로 1786년(정조10) 7월 어느 날 그와 뜻을 함께하는 문인(文人)들이 모여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교유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이를 옥계시사(玉溪詩社) 혹은 송석원시사라고 불렀는데, 당시에 있었던 시사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모임으로서 이에 문인으로서 이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은 수치로 여길 만큼 유명하였다고 한다. 저자 또한 이 모임의 일원으로, 구성원들이 지은 시를 모아 책으로 엮어 『옥계시사』라고 이름 짓고 이 책의 서문을 지어 편찬 경위 등을 서술하였는데 위는 그 내용 중 일부이다.
여러 사람이 주고받은 시들을 모아 책으로 엮는 것은 당시에 흔한 일이었다. 허나 그러한 책에 ‘역사’를 의미하는 ‘사(史)’ 자를 붙이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러하기에 저자는 먼저 그 이유부터 설명한다. 비록 시를 통해서이지만 저자와 시사의 구성원들이 함께해 온 시간 동안 겪은 모든 일들은 마치 역사책에 기술된 역사적 사실처럼 이 책에 모두 담겨 있다. 함께해 온 수많은 날들 동안 송석원의 하늘과 땅과 사람 사이에서 오감으로 느낀 모든 일들은 구성원들 저마다의 언어로 재탄생하였기 때문에 ‘사’ 자를 붙였다고 말한다.
저자에게, 이 책에 실린 시라는 것은, 단순히 뜻을 표현한[言志] 글이라는 의미에 그치지 않았으리라. 구절구절 그와 시사의 구성원들이 시와 술을 주고받으며 표현한 희로애락의 진정이 담겨 있고 이는 결국 그들의 삶 자체나 다름없을 터이다. 역사를 통해 과거를 증명하듯 이 책을 통해 시사로 엮인 그들의 삶을 증명하는 셈이다.
중인(中人)으로서 이 시사에 참여한 장혼(張混, 1759~1828)이 쓴 「옥계사 수계첩 뒤에 쓰다[書玉溪社修禊帖後]」를 보면 이 시사의 성격을 보다 상세하게 살필 수 있다. 사는 곳이 가깝고 나이가 비슷할 뿐만 아니라 뜻이 아주 통하는 이들끼리 계를 결성하되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영원토록 변치 않을 문학을 통한 교분을 맺기로 약속한 것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중간에 딴 마음을 먹는 것을 우려한 장혼의 주장으로 글로 적어 증거로 남기기로 한 일이다.
박윤묵의 글이 지어진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글의 제목이나 내용을 보았을 때 시사가 결성된 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일 것이라는 추론은 가능하다. 실제 그들의 교우 양상과 시사 활동 양태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대체로 시사를 처음 결성할 때와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의 분위기가 크게 바뀌지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이는 장혼의 글에서 ‘바둑과 장기로 사귄 관계는 하루도 못 가고 권력과 이익으로 사귄 관계는 1년을 못 가고 오로지 문학으로 사귄 관계만이 영원할 수 있다.[博奕之交不日 勢利之交不年 惟文學之交可以永世]’라고 한 말처럼, 처지가 비슷한 이들끼리 문학을 통해 의기투합한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지금은 사람도 시사도 스러져 남아 있는 것이 없어서 당시를 증명할 수 없지만 몇 줄 글로 본 그들의 삶은 부럽기만 하다. 살아가면서 나와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몇이나 만날 수 있을까. 그런 사람을 시로 만나는 일은 더더욱 어려운 일일 것이다. 허나 언제고 그런 날이 오면 우리의 시, 우리의 노래를 우리의 역사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글쓴이강만문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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