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고전의 향기

아름답기 때문에 왔다

백광욱 2017. 10. 26. 00:25

 

 

 

아름답기 때문에 왔다.
아름답지 않다면 오지 않았을 것이다.

 

 

佳故來 無是佳 無是來
가고래 무시가 무시래


- 이옥(李鈺, 1760~1812), 「중흥유기(重興遊記)」 중에서

해설

   1793년 음력 8월경, 이옥은 몇몇 벗들과 함께 한양 근교 북한산을 유람하고서 이런 글을 남겼다.

   총론(總論) 1칙(一則)
   바람은 잔잔하고 이슬은 정결(淨潔)하니 8월은 아름다운 계절이고, 물은 흘러 움직이고 산은 고요하니 북한산은 아름다운 지경(地境)이며, 개제순미(豈弟洵美)한 몇몇 친구는 모두 아름다운 선비이다. 이런 아름다운 선비들로서 이런 아름다운 경계에 노니는 것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자동(紫峒)을 지나니 경치가 아름답고, 세검정(洗劍亭)에 오르니 아름답고, 승가사(僧伽寺)의 문루(門樓)에 오르니 아름답고, 문수사(文殊寺)의 문에 오르니 아름답고, 대성문(大成門)에 임하니 아름답다. 중흥사(重興寺) 동구(峒口)에 들어가니 아름답고, 용암봉(龍岩峰)에 오르니 아름답고, 백운대(白雲臺) 아래 기슭에 임하니 아름답고, 상운사(祥雲寺) 동구가 아름답고, 폭포가 빼어나게 아름답고, 대서문(大西門) 또한 아름답고, 서수구(西水口)가 아름답고, 칠유암(七游岩)이 매우 아름답고, 백운동문(白雲峒門)과 청하동문(靑霞峒門)이 아름답고, 산영루(山暎樓)가 대단히 아름답고, 손가장(孫家莊)이 아름다웠다.
   정릉동구(貞陵洞口)가 아름답고, 동성(東城) 바깥 모래펄에서 여러 마리 내달리는 말을 보니 아름답고, 3일 만에 다시 도성에 들어와 취렴(翠帘), 방사(坊肆), 홍진(紅塵), 거마(車馬)를 보게 되니 더욱 아름다웠다. 아침도 아름답고 저녁도 아름답고, 날씨가 맑은 것도 아름답고 날씨가 흐린 것도 아름다웠다. 산도 아름답고 물도 아름답고, 단풍도 아름답고 돌도 아름다웠다. 멀리서 조망해도 아름답고 가까이 가서 보아도 아름답고 불상도 아름답고 승려도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안주가 없어도 탁주가 또한 아름답고, 아름다운 사람이 없어도 초가(樵歌)가 또한 아름다웠다.
   요컨대 그윽하여 아름다운 곳이 있고 밝아서 아름다운 곳도 있었다. 탁 트여서 아름다운 곳이 있고 높아서 아름다운 곳이 있고, 담담(淡淡)하여 아름다운 곳이 있고 번다하여 아름다운 곳이 있었다. 고요하여 아름다운 곳이 있고, 적막하여 아름다운 곳이 있었다. 어디를 가든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고, 누구와 함께 하든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었다. 아름다운 것이 이와 같이 많을 수 있단 말인가?
   이자(李子)는 말한다.
   “아름답기 때문에 왔다. 아름답지 않다면 오지 않았을 것이다.”

 

總論 一則
風枯露潔 八月佳節也 水動山靜 北漢佳境也 豈弟洵美二三子 皆佳士也 以玆游於玆 如之何游之不佳也 過紫峒佳 登洗劍亭佳 登僧伽門樓佳 上文殊門佳 臨大成門佳 入重興峒口佳 登龍岩峰佳 臨白雲下麓佳 祥雲山峒口佳 簾瀑絕佳 大西門亦佳 西水口佳 七游岩極佳 白雲靑霞二峒門佳 山暎樓絕佳 孫家莊佳 貞陵洞口佳 東城外平沙 見群馳馬者佳 三日復入城 見翠帘․坊肆․紅塵․車馬更佳 朝亦佳 暮亦佳 晴亦佳 陰亦佳 山亦佳 水亦佳 楓亦佳 石亦佳 遠眺亦佳 近逼亦佳 佛亦佳 僧亦佳 雖無佳殽 濁酒亦佳 雖無佳人 樵歌亦佳 要之 有幽而佳者 有爽而佳者 有豁而佳者 有危而佳者 有淡而佳者 有縟而佳者 有耐而佳者 有寂而佳者 無往不佳 無與不佳 佳若是其多乎哉 李子曰 佳故來 無是佳 無是來

 

   글 한 편에 온통 ‘아름답다[佳]’는 말 뿐이다. ‘산이 거기 있어 간다’는 서양 등산가의 말보다 ‘아름답기 때문에 왔다’는 이옥의 말이 가슴에 더 와 닿는다. 추석이 지난 이맘때쯤의 북한산은 예전에도 아름다웠을 것이다. 이름난 산수를 찾아 자연 속에 ‘노닐고자’ 했던 심성의 발로가 ‘유산(遊山)’ 문학을 낳았다. 때문에 그들이 남긴 ‘산수유기(山水遊記)’는 동양 문학의 면면한 정신세계를 보여준다.

 

   18세기, 정조가 주도한 ‘문체 반정(文體反正)’ 속에서도 자신의 문체를 지키며 귀양길을 선택했던 천재 문인 이옥! 이옥의 북한산 유람기를 읽으며 새삼 산이 우리 삶에 가까이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옥의 자는 기상(其相), 호는 문무자(文無子), 매사(梅史), 매암(梅庵), 경금자(絅錦子), 화석자(花石子), 청화외사(靑華外史), 매화외사(梅花外史), 도화유수관주인(桃花流水館主人)이다. 「중흥유기」는 친구인 김려의 『담정총서(潭庭叢書)』에 실려서 전한다.

 

글쓴이한문희(韓文熙)
한국고전번역원 출판콘텐츠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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