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겨운 삶/오늘도한마디

무엇보다 '사람의 행복'이 최선이다

백광욱 2024. 6. 3. 00:05

 

무엇보다  '사람의 행복'이 최선이다

 

예전에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지켜." 이런 식이었습니다. '할 수 있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명확히 구분 지어져 있었죠. 하지 말란 걸 하면 징계가 내려졌습니다. 이유는 없었습니다. '원래 그래'란 말이 주로 관습이고 관행이라 했습니다. 그냥 지키라고, 하라는 대로 하라고, 안 하면 안 된다고 하는 명령이었죠.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규범과 규칙도 분명 있었습니다. 어떻게 생겨난 건지, 왜 지켜야 하는지도 모르는데도 윤리와 규범, 규칙은 자가 발전하듯 끊임없이 증식했습니다. 확장되고 심화되었죠. 거기에 '왜'라는 질문을 넣는 건 그 당시 불경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관습과 관행에 따른 규범과 윤리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처럼 여겨졌죠. 뭘 위한, 누굴 위한 규범인지는 논외였습니다. 오로지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만 중요한 사실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어른의 말에 토를 달면 안 되고, 학교에서 머리 길이는 3cm를 넘기면 안 되고, 머리가 길면 잘리고, 추운 겨울에도 교복 위에 패딩 점퍼를 입으면 안 되고, 만약 점퍼를 입고 학교에 오면 옷을 뺏기고, 느닷없이 학생 가방을 뒤지고, 잘못했으면 맞는 것도 감수해야 하고, 치마가 짧다는 이유로 밥도 못 먹게 하고 출근 시간은 반드시 지키되 '칼퇴근'은 웬만하면 해서는 안 되고, 법에 규정되어 있는데도 열악한 노동 현장의 개선을 요구해선 안 되고, 일하다 다쳤는데 산재 처리하면 안 되고, 아무리 위험한 일을 해도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은 당연한 거고, 법적으로 정해져 있는 휴가도 당당히 쓰면 안 되고,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선 안 되고 기타 등등... 기타 등등... 기타 등등...

 

 

 

규범이든 관습이든 관행이든, 그것이 뭐라 불리든 인간의 삶을 통제하는 규칙에서 인간의 행복은 논의 대상이 아니었죠.

왜 머리를 짧게 잘라야 하는 건지, 날씨가 추운데도 패딩 점퍼를 입으면 안 되는 건지, 노동시간 수를 그리 중요하게 여기 는데 제 시간보다 늦게 퇴근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건지, 자기 의사를 표명하는 게 인간인데 왜 어른 말에 토 달면 말대답이라 하는지, 쓸모가 있고 없고를 어떻게 판단하기에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선 안 된다고 하는 건지… 이런 질문은 생략해야 했습니다. 오로지 규범만이 중요했고, 그 규범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란 문제는 제기해서도 안 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냥 지키라고만 하고 규범은 사람을 그렇게 도구화시켰습니다. 사람 자체를 하나의 존재로 인정하지 않고 거대한 조직의 부속품으로 전락시킨 것이죠.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규범은 무척이나 세심하고 디테일하기까지 했습니다. 하나의 규범이 또 하나의 규범을 낳았고, 규범을 어긴 건지 그렇지 않은 건지 애매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새로운 규범이 또 다시 생겨났습니다. 그 규범의 목적은 단 하나였죠. 그것은 바로 ‘사람에 대한 통제’였습니다.

 

 

 

영국의 논리학자 버트란드 러셀은 "규범이 좋은가 나쁜가하는 문제는 그것이 인간의 행복을 증진시키느냐 않느냐 하는 문제와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처럼 모든 규범의 좋고 나쁨은 인간의 행복을 증진시키느냐 저해시키느냐에 달려있는 것이죠.

 

만약 인간에 대한 존중이 결여된 규범이라면, 그건 오래된 관습이자 적폐에 불과하고, 다른 인간을 통제하고 억압하려는 권력에 불과할 것입니다. 규범은 사회를 구성하고 다른 인간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질서이기에 필요하긴 하지만, 질서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게 인간의 행복이 아닐까요? 너와 나, 우리 모두의 행복,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세상에 그 어느 것도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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