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제자리에 놓였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
모든 것은 제자리에 놓였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
책상 앞에는 흑백사진 한 장이 걸려 있습니다. 매화가 활짝 핀 산사의 돌담을 찍은 것이죠. 진흙을 이겨 틈을 메우고 기와지붕을 얹은 담은 쌓은 지 오래된 듯 가운데가 주저앉았습니다. 제 자리를 벗어나 엉켜 있는 돌들에 초점을 맞춘 사진은 틈틈이 마음의 환기창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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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돌담 쌓는 일을 눈여겨본 적이 있습니다. 다니는 절에서 도랑을 정비하며 돌담을 쌓기 시작한 것입니다. 부도탑들이 놓인 야트막한 언덕 아래 돌담을 쌓아 흙의 유실을 막고, 고즈넉한 돌담의 운치도 감상할 수 있게 하려는 배려였습니다.
일주문을 들어서자마자 절 마당에는 어디서 운반해 왔는지 크고 작은 돌덩이들이 쌓여 있었습니다. 기중기가 커다란 돌덩이를 들어 제자리를 잡아 주면 다음 일은 석공과 목도꾼 차지였습니다. 목도꾼을 본 것도 참 오랜만이어서 기도를 마친 나는 돌담 쌓는 일을 오래도록 바라보곤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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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바뀌고 돌담 쌓기가 끝난 지금, 군데군데 잘생긴 소나무를 심어 도량은 도심 속 천년고찰의 정취를 한껏 풍기고 있습니다. 돌담이 완성된 뒤로는 절을 향하는 마음이 봄날 아지랑이처럼 부풀어 오릅니다.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연인들의 심사라고나 할까요. 기도하러 절에 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 쌓은 돌담에 반해 발걸음을 재촉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서둘러 돌담 앞에 서면, 어떤 날은 아예 거기서 기도를 올리고 싶을 정도로 돌담이 내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돌들은 하나씩 뜯어보면 그리 잘생긴 것도 아닙니다. 투박하고 못생긴 돌들이 더 많습니다. 씨름선수처럼 덩치가 커다란 놈이 있는가 하면, 얄팍하고 자그마해서 물수제비를 뜨면 제격일 놈도 있죠.
대청마루에 넉장거리로 누워 낮잠에 빠진 듯 길게 놓인 돌, 야무지고 용골차서 공연히 꿀밤을 한 대 먹이고 싶은 놈, 어떤 돌은 비상을 꿈꾸는지 날렵하게 꽁지를 들어 올렸습니다. 거무튀튀한 돌이 있는가 하면, 백옥 같은 피부를 지닌 것도 있습니다. 돌담 앞에 서 있으면 주절주절 말을 걸고 싶어집니다. 다가가 한번 쓰다듬고도 싶죠. 콘크리트 담장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충동입니다. 다정하게 말을 걸면 돌담은 기다렸다는 듯 소소한 이야기를 풀어낼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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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여울물의 재잘거림을 담고 살아왔을 조약돌. 설해목의 비명에 놀라 산을 떠났을지 모를 우락부락한 바윗덩이, 당산나무 그늘에서 엿들은 비밀을 품고 쩔쩔맬 반석은 어떤 돌보 다 먼저 내 말에 대꾸할 게 분명합니다.
크고 작은 돌들이 어우러진 돌담. 그 앞에 서면 마음이 고요해집니다. 버려진 돌 하나 없이 어쩌면 모두 꼭 맞는 제자리를 차지했는지 놀랍습니다.
모든 사물은 제자리에 놓였을 때 가장 아름답게 빛나죠. 분명 나도 꼭 맞는 내 자리를 차지했을 텐데, 그 자리에 만족하며 산 날이 얼마나 될까요. 내 자리가 아니라고 투정을 부리고 남의 자리가 부러워 탐낸 것은 아닌지, 돌담 앞에서 다시 한 번 되짚어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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