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겨운 삶/다정다감한삶

재벌집 막내딸이 물려받지 못한 한 가지

백광욱 2023. 2. 25. 00:02

 

재벌집 막내딸이 물려받지 못한 한 가지

 

“해장할 사람~!!”

 

점심시간이 한참 남았는데 파티션 너머로 소리치는 내 모습에 팀원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다. 평소와 다른 행동에 당황하는 것 같았다.

 

전날 저녁 폭음을 한 덕에 밤새 속이 좋지 않았다. 워낙 짧은 시간 안에 여러 종류를 많이 마셔서 그런지 속이 말이 아니었다. 술을 잘하지는 못하지만, 필요한 경우에는 마다하지 않는 편이라 주량을 훨씬 넘기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날도 그랬다.

 

여느 때보다 더 폭주하게 만든 대상은 소위 재벌집 막내딸이었다. 이름만 대면 모두가 다 아는 기업의 막내딸로 창업주인 아버지에게 계열사를 물려받아 경영하고 있는 재벌 2세였다. 나와는 중요한 프로젝트를 함께 하는 업무 파트너로, 본격적인 시작에 앞서 친목을 다지는 목적으로 자리를 함께한 것이었다.

 

초면이긴 해도 각자의 소개가 굳이 필요 없었다. 이미 잡지나 기사에서 본 내용만으로도 충분했다. 식사 전 소개를 하며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여느 자리와는 달리,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느껴져 시작부터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의외로 소탈한 모습이 놀라웠다. 한눈에 보기에도 소재가 좋아 보이는 옷과 구두와는 별개로, 말하는 어투나 화답하는 내용이 특별해 보이지 않았다. 나물류를 좋아한다며 한두 번 더 달라 하는 것과 흥미로운 이야기에 호호거리며 웃는 것이 보통의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재벌에 대해 내가 무슨 상상을 했던 걸까? 오히려 담당 임원에게 맡겨도 될 일을 직접 나서는 것에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분위기가 무르익을수록 속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긴 했지만, 확실히 집중력이 떨어지고 있음이 느껴졌다. 시계를 보니 7시도 되지 않았다. 초저녁에 만난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른 시간이었다. 나의 몸 상태는 이미 자정을 향해 가고 있는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잠시 진정하려 살짝 빠져나오니, 먼저 나온 재벌집 막내딸의 모습이 보였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꼿꼿이 앉아 있던 조금 전까지의 모습과는 달리 비틀거리는 걸음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화장실을 찾는지 휘청거리며 좌우를 살피는 것이 불안하게 느껴졌다. 부축을 해드려야 하나 살짝 고민이 되었지만 우선은 모른 척 기다리기로 했다.

 

시간이 흘러도 오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나 하여 가보니 아니나 다를까 가슴을 움켜쥐고 고개를 떨군 채 무척 괴로워하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걱정스런 마음에 다가가 묻자 화들짝 놀라며 몸을 나와는 반대쪽으로 휙 돌렸다.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았다. 순간 민망한 생각이 들었다. 방금 전까지의 친근한 태도와는 전혀 딴판이라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괜찮아요!” 짧은 대답 후 다시 만난 술자리에서 단정한 매무새로 앉아 있는 모습에 놀라움이 느껴졌다.

 

‘차라리 힘들다 말씀하시지!’

 

애써 태연한 척하는 모습이 전혀 괜찮아 보이지가 않았다. 프로답다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살짝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전 일이 생각났다. 남보다 빨리 승진했던 그 시절, 나의 가장 큰 스트레스는 사람들이 무시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누가 뭐라 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만들어낸 염려로 늘 예민해 있었다. 일에 대한 고민보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완벽하게 보일 수 있을지에만 관심을 갖다 보니 무리수도 많이 두었다. 의미 없는 작은 일에도 발끈해 하고, 넘어가도 될 일을 굳이 드러내는 행동들은 끊임없는 상처와 잡음을 만들어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를 솔직하게 인정하면 한결 수월했을 길을 힘들게 돌아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앞선 인정이 오히려 독이 된 셈이다.

 

그녀와의 만남 후 나는 내 삶에서 힘을 더욱 빼기로 했다. 가리려 한다고 나의 티끌이 완전히 감추어지지도 않을뿐더러, 감추려 노력하는 그 모습이 오히려 가장 부족한 점처럼 보일 수 있을 것 같았다.

 

“해장할 사람~ 없어?”

 

다시 물었다. 그리고 쭈뼛쭈뼛 손을 드는 친구들에게 말했다.

 

“순댓국, 특으로 쏠게. 속 쓰려서 일을 못 하겠네~”

 

나는 솔직함이 타인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한다. 있는 그대로 나를 보여주고 다가가는 것이 그 사람을 존중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한 뼘으로 가려지지 않는다면 차라리 함께 보는 것. 그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완벽한 방법임을 점점 깨닫게 된다.

 

< 출처 : 행복한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