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1374

어린 임금의 넋을 달랜 또 한 명의 충신

어린 임금의 넋을 달랜 또 한 명의 충신 또 아뢰기를, “경기, 공충, 강원 삼도의 유생인 유학 홍선용(洪善容) 등의 상언에 ‘문경공(文景公) 박충원(朴忠元)을 영월(寧越)의 창절사(彰節祠)에 배향하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박충원은 영월 군수로 재직하던 어느 날 문득 정신이 황홀한 가운데 단묘(端廟)를 가까이서 모시고 옥음(玉音)을 친히 받들어 마침내 옛 봉분을 찾아내 소장을 올려 조정에 보고하였습니다. 조정에서는 이로부터 분묘를 개축하여 비로소 배향(陪享)하는 일을 거행하게 되었으니, 그 충렬(忠烈)을 논하자면 거의 육신(六臣)과 아름다움을 나란히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연전에 사림(士林)의 상소에서 홍주(洪州)의 노은사(魯恩祠)에 배향할 것을 청하였는데, 묘당의 복계에 ‘노은..

나는 완전 바보, 그대는 반절 바보

나는 완전 바보, 그대는 반절 바보 나는 완전 바보 그대는 반절 바보 오경에도 시를 지어 그댈 부르네. 기다려도 오지 않아 꿈에까지 찾았건만 그대 와서 읊조릴 적 나는 알지 못했노라. 我是全癡君半癡 아시전치군반치 五更呼喚句成時 오경호환구성시 待君不至重尋夢 대군부지중심몽 君到吟詩我不知 군도음시아부지 - 이병연(李秉淵, 1671~1751), 『사천시선비(槎川詩選批)』 권하 「차운하여 반치옹에게 사과하다(次謝半癡翁)」 청장관 이덕무는 사천 이병연을 영조조 첫째 가는 시인이라 높이 평가하면서, “사천(槎川) 당시의 화가(畫家)로는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祏), 겸재(謙齋) 정선(鄭敾)이 있었다. 함께 백악산(白岳山) 밑에 살았는데 문채와 풍류가 한때 찬란했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소개할 작품에는 사천과..

유람을 나서야 하는 이유

유람을 나서야 하는 이유 옛사람들은 세상을 두루 유람하고, 한곳에 얽매여 사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古之人 周觀博遊 恥匏繫一隅 고지인 주관박유 치포계일우 - 유몽인(柳夢寅 1559-1623), 『어우집(於于集)』 권4 「증금강산삼장암소사미자중서(贈金剛山三藏菴小沙彌慈仲序)」 유몽인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64세(1622) 때 금강산 표훈사(表訓寺)에 머물고 있었다. 어느 날 그 옆 삼장암(三藏菴)의 승려 법견(法堅)이 젊은 제자 자중(慈仲)을 보내 글을 청했는데, 위는 그때 써준 글의 첫 부분이다. 법견은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제자로 임진왜란 때 의승장(義僧將)으로 활약하였다. 유몽인은 얽매임을 싫어하여 약관(弱冠) 때부터 산수 유람을 나섰다. 삼각산·천마산·설악산·금강산 일대를 보았고, 마천령을 지..

만년의 절조

만년의 절조 시중(侍中) 강감찬(姜邯贊)은, 경술년(1010, 현종1) 거란이 처음 침입했을 때 여러 신하들은 항복을 논의하였는데 홀로 파천(播遷)하여 회복을 도모하자고 청하였고, 무오년(1018) 거란이 재차 침입했을 때 상원수(上元帥)로서 서도(西都)에 나가서 교전할 때마다 어김없이 이기니, 10만의 강포한 적들 중에 귀환한 자가 수천에 지나지 않았다. 거란이 전투에서 이처럼 심하게 패배한 적은 없었으며 시중보다 훌륭한 공을 세운 신하는 없었다. 그러나 개선한 뒤 곧바로 고로(告老)하였고 임금이 친히 금화(金花) 여덟 가지를 꽂아 주자 배사(拜謝)하며 감히 감당하지 못하였으니, 공을 세운 것이 훌륭한 점일 뿐만이 아니라 고로한 것이 더욱 훌륭한 점이다. 일흔 살에 치사(致仕)한 일은 고..

한양 땅을 내려다보다

한양 땅을 내려다보다 목멱산에 올랐다. 산의 높이는 수천 길이요, 서북쪽으로는 백악산(白岳山), 삼각산(三角山), 인왕산(仁王山)의 여러 산들이 바라보이는데 높은 산들이 모여서 하늘에 서려 서로 읍하는 듯 서로 껴안는 듯하다. 동쪽으로는 백운산(白雲山)의 뻗어 나온 산기슭이 구불구불 내려가 남산과 합하였다. 산등성이를 빙 둘러서 성가퀴와 망루가 있어서 종소리와 북소리가 서로 들린다. 이 성안의 지세는, 가로 10여 리, 세로는 그 3분의 2가 된다. 이곳에 종묘사직, 궁궐, 곳집, 창고, 성균관, 정원이 다 들어서 있다. 그 외에 고관대작과 온갖 벼슬아치들의 관아이고 그 나머지는 수만 채의 가옥, 수백채의 가게, 수십 개의 저자거리이니, 이 모든 것이 또렷하게 손바닥 안에 있는 듯 한눈에 ..

신지도(薪智島) 해녀의 숨비소리

신지도(薪智島) 해녀의 숨비소리 상현과 하현에 파도 소리 줄면 해녀들 짝 이뤄 풀처럼 진을 쳐 돌아보며 옷 벗으라 재촉하고 허리춤 꽉 묶었는지 꼼꼼히 살피네 바다에서도 평지를 걷듯 하고 저마다 두레박 하나 끼고 있네 머리 숙여 발을 차고 입수하니 물에 사는 인어인가 의아하네 잠시 사이에 고요해져 그림자도 없으니 바다거북과 상어한테 잡혀먹히지는 않았는지 잠시 뒤에 보니 번갈아 머리 내밀고는 휘파람 불듯 숨비소리 내뿜네 오르락내리락 십여 차례 반복하더니 광주리에는 해산물이 가득 둘러앉아 해산물 헤아리는데 바위처럼 수북이 쌓여 있네 뛰어난 재주에도 천대받아 마을에는 함께 살지 못하네 중국 사람들 전복 크다고 자랑하며 손가락 몇 개 겹친 크기라 하는데 지금 보니 대야와 쟁반만 한 것도 있고 작은 것도 말 위의 ..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 이롭다고 하여 조급히 나아가서도 안 되고, 위태롭다고 하여 용감하게 물러나서도 안 된다. 不可以利躁進 不可以危勇退 불가이리조진 불가이위용퇴 - 김시습(金時習, 1435~1493), 『매월당집(梅月堂集)』 「매월당문집(梅月堂文集)」 권18 요즘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도 불구하고 떠나야 할 때 떠나지 않고 버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또 흠결이 있으면서도 더 높은 자리를 탐하다가 그동안의 명성에 먹칠하는 사람들도 보게 된다.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은 드물고 민낯을 보여주는 사람은 많아지니 사회가 점점 퇴보하는 느낌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처신(處身)하는 데에 자주 어려움을 겪는다. 더구나 중요한 관직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자리를 두고 진퇴를 결정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

요즘 아이들

요즘 아이들 부모 없는 사람 있으랴만 효자는 드물다. 人孰無父母 而孝者盖尠 인숙무부모 이효자개선 - 윤기(尹愭, 1741〜1826), 『무명자집(無名子集)』 책10, 「독서수필(讀書隨筆)」 윤기의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경부(敬夫), 호는 무명자(無名子)다. 5,6세에 한시를 지을 정도로 총명하였으나 50대에 늦깎이로 과거에 합격한 인물이다. 독서수필(讀書隨筆)은 ‘책을 읽고 붓 가는 대로 쓰다’ 정도의 의미다. 무명자는 ‘부모님께서 살아계시면 멀리 나가지 않으며 나갈 때 반드시 일정한 소재가 있어야 한다.〔父母在 不遠遊 遊必有方〕’라는 『논어』 내용을 읽었던 모양이다. 글을 읽다가 세태를 돌아본 그는 “세상에 부모 없는 사람 없지만 효자는 드물다.”라고 한탄하였다. 세태가 어떠했기에? 멀리 나가고 ..

정착하지 못한 충혼(忠魂)

정착하지 못한 충혼(忠魂) - 성삼문(成三問)신주 봉안 논쟁 - 또 아뢰기를, “홍주(洪州) 노은서원(魯恩書院)의 유생인 유학 최건(崔謇) 등의 상언(上言)에 ‘충문공(忠文公) 성삼문(成三問)의 사판(祠版)은 그 부인이 직접 쓴 필적인데, 오랫동안 묻혀 있다가 다행히 다시 나타났습니다. 다만 제(題)한 방법이 또 예식(禮式)과 달라 가묘(家廟)에서 모시기에는 적합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차마 다시 묻을 수도 없어 그대로 노은서원의 위판(位版) 뒤에 봉안하였으니, 후세의 사람들이 감회를 일으키는 것은 진실로 여기에 있고, 선현이 의기(義起)하여 깊은 뜻을 둔 것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대신 제사를 지내는 자손이 모시고 갈 것을 청하였으니 이는 선현이 이미 정한 의론에 크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