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고전의 향기

장애인으로 살아가기

백광욱 2018. 2. 22. 09:57

 

 

 

장애인으로 살아가기

 

또 이단전의 시에 차운하여[又次李亶佃韻]

 

빈천하면 깔보는 게 보통사람 마음인데
홀로 거기에 초연한 그대는 누구인가
물속을 환히 보듯 신령스런 마음 지녀
풀에 붙은 티끌처럼 외물을 경시하네
응어리 씻어 내려고 시인 술꾼 되어선
흥겹게 즐기면서 태평 세상 꿈도 꾸지
후세에도 알아줄 이 없다한들 어떠리
그대에겐 분명히 고귀한 것이 있나니

 

固是常情侮賤貧고시상정모천빈
超然獨也爾何人초연독야이하인
靈心炯似照犀水영심형사조서수
外物輕如棲草塵외물경여서초진
磈磊謾成詩酒傑외뢰만성시주걸
嬉遊時夢葛羲民희유시몽갈희민
不須後世子雲識불수후세자운식
席上分明自有珍석상분명자유진

- 윤기(尹愭, 1741∼1826), 『무명자집(無名子集)』 시고(詩稿) 책(冊)2

해설

   이 시는 영정조 때의 학자 윤기가 필한(疋漢) 이단전(李亶佃, 1755∼1790)이란 인물에 대해 읊은 시이다. ‘필한(하인놈)’이라는 호와 ‘단전(진짜 머슴)’이라는 이름에서 보듯, 그는 신분이 미천한 종이었다. 거기에 발음이 부정확한 언어장애가 있었고 한쪽 눈을 잃은 시각장애를 지녔으며, 체구가 작은 왜소증에다 마마를 앓아 얼굴이 심하게 얽은 사람이었다. 이 천형(天刑)과도 같은 기구한 운명 앞에서 그의 어머니는 얼마나 참담하고 기막혔을까? 자기 업보라 생각하며 평생 죄인으로 살다 갔을지 모를 일이다.

 

   장애인에 대한 우리 속담이 88개나 된다는 사실에서 증명되듯, 예로부터 장애인은 가문의 부끄러움으로 여겨져 숨어 살아야 했고 밖에 나가면 편견과 질시의 대상이었다. 우리만큼 개성에 대한 거부감과 남다른 것에 대한 배척이 심한 민족이 또 어디 있는가? 게다가 노동력이 중시되는 농경사회에서 장애인은 더더욱 밥을 축내는 천덕꾸러기였다. 이러한 시대의 한가운데 던져진 이단전의 삶이 어떠했을지, 자라면서 사람들에게 받았을 무시와 조롱, 그리고 그로 인한 열등감과 상처의 깊이가 어떠했을지 짐작이 간다. 그래서 더욱 처절했을 그의 자의식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조물주는 대관절 무슨 생각으로 조선 땅 한 구석에 날 낳았을까. 혹여라도 천축(天竺)에 가게 된다면 무슨 인연인지 부처께 물어보리라.”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끝내 그를 키우고 구원한 것 역시 사람이었다. 어깨너머로 글을 터득하는 재주를 주인인 유언호(兪彦鎬)가 알아보고 키워주었고, 그의 남다른 시적 재능은 남유두(南有斗)와 이덕무(李德懋)에 의해 꽃을 피웠다. 그의 시는 “화를 내는 듯, 비웃는 듯, 밤에 과부가 곡을 하는 듯, 길손이 추운 새벽에 일어나는 듯”하고, “뭐라 형언하기 어려울 만큼 평범한 시상(詩想)을 초월해 있다.”고 평해진다. 시대에 대한 비판 정신이 있고 마음이 외로운 이들을 향한 위로가 있고 영롱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지혜와 독특한 개성이 있다는 얘기다.

 

   그는 산수를 좋아하여 유람에는 늘 두발 벗고 나섰으며, 책을 읽을 때에는 내용에 따라 데굴데굴 구르거나 펄쩍펄쩍 뛰기도 하고 어떤 때는 하염없이 통곡하기도 하였다. 술을 마다하지 않았고 사대부들에게도 거침없이 소신을 피력하는 등, 행동에 전혀 걸림이 없었다고 한다. 생계를 위한 돈벌이로 글을 필사해주고 돈을 받는 ‘용서(傭書)’를 했는데, 그마저도 바로 술을 받아 마시면서 “인생 백년은 그리 길지 않다. 쌀과 소금, 땔감에 머리를 처박고 사는 건 슬픈 일이다. 술은 청탁(淸濁)을 가려서는 안 되고 시는 고고(高古)하지 않으면 신기하지 않다.”고 외쳤던 참으로 영혼이 자유로운 시인이었다.

 

   밀턴도 실명한 후에 『실낙원』을 썼으며, 시인 바이런도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이었다. 『돈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도 왼쪽팔 절단장애였고 톨스토이는 간질이었으며 성악가 안드레아 보첼리도 시각장애인이었다. 이들은 모두 장애의 한계를 극복하고 인간 승리의 신화를 쓴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주목할 것은 한 개인의 인간 승리와 성공에 대한 감탄이 아니라 이 시대의 수많은 이단전들이 각자의 재능을 발견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고 즐기면서 인생의 성취를 이루도록 함께 여건을 마련하는 일이다. 편견없이 있는 그대로 우리의 이웃으로 대하며 더불어 행복할 수 있어야 한다. 집값이 떨어진다고 장애인 학교의 설립을 반대하는 사람들 앞에 더 이상 무릎 꿇고 울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어야 한다.

 

 

글쓴이이기찬
한국고전번역원 고전문헌번역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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