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이의 혼례일에 선친을 그리며
아들아이의 초행(醮行)에 함께 가는 말 위에서 선친의 유고에 있던 시구가 떠올라 감회에 못 이겨[帶兒子醮行馬上 憶先人遺藁句語 不勝感懷] -선친의 「원조(元朝)」 시에 “내 나이 오십여 세, 네 나이 이제 열둘. 꼭 오륙 년은 지나야, 네 장가가는 모습 보겠구나.”라는 구절이 있는데, 내가 아직 장성하지 못한 때였기에 서글퍼하며 이 시를 지으신 것이다. [先人元朝詩 有吾年五十餘 汝年今十二 恰過五六年 始可見汝娶 蓋以不肖未及成長 故憫然有是詩] 백발의 행색으로 아들아이의 요객(饒客)이 되니* 온종일 말 달려 가도 고단한 줄 모르겠구나 ‘꼭 오륙 년은 지나야’라는 선친 유고의 시어를 지금 떠올리자니 눈물이 옷깃을 적시는구나 白頭行色爲兒饒 백두행색위아요 終日馳驅不說勞 종일치구불설로 恰過五年先藁語 흡과오년선고어 至今追憶血沾袍 지금추억혈첨포 *요객(饒客)이 되니 : 초행에 함께 가는 것을 당시에 ‘요객이 된다’라고 하였다.[帶醮行 俗呼爲饒客] |
- 이수인(李樹仁, 1739~1822), 『구암집(懼庵集)』 권1 「시(詩)」
해설 |
1750년 설날 아침은 경주에서 동도팔사(東都八士)의 하나로 꼽히는 이위현(李渭賢, 1699~1752)의 집에도 찾아왔다. 없는 살림이라도 여느 집처럼 명절을 치르느라 분주한 가운데 이위현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이미 쉰을 넘긴 그에게는 마흔을 넘어 겨우 얻은 하나뿐인 아들이 있는데, 또 한 살을 먹은 자신은 점점 노쇠해져만 가고 겨우 한 살을 먹은 아들은 초례(醮禮)를 치르기에는 아직 어리기 때문이었다. 5, 6년은 지나야 제법 사내다운 티가 나고 그래야 장가를 보낼 수 있을 텐데 자신의 건강이 버텨줄지 의문이었다. 그 자신이 며느리를 보고 손주를 안고 싶기도 했지만, 행여 저 금쪽같은 아이가 아비 없는 자식이라고 욕을 당하지는 않을까 두려웠을까. 이러한 심정이 담긴 시를 짓는다.
1793년쯤으로 생각되는 어느 날, 이위현의 아들 수인은 초례를 치르러 신부 댁에 가는 아들 효영(孝永)과 동행하게 된다. 이미 쉰을 넘긴 그에게 마흔에야 겨우 얻은 하나뿐인 아들의 혼례식은 그야말로 인생에 몇 번 없는 경사였으리라. 백발이 성성한 나이로 온종일 말을 탔는데도 피로조차 모를 정도였다.
생각해 보면 그는 참으로 고단한 삶을 살아왔다. 열넷에는 부친을, 열다섯에는 조부를, 열여덟에는 모친을, 스물넷에는 처음 맞이한 부인을 잃었다. 게다가 선친 때까지는 그래도 형제가 적지는 않았는데, 선친에게 자식이라고는 자신과 일찍 죽은 누이뿐이었고, 자신에게는 그나마도 지금 장가를 가는 아들 고작 하나뿐이었다.
그 수많은 일을 겪는 동안 때로는 일찍 돌아가신 선친이 원망스럽기도 했으리라. 하지만 같은 아버지의 입장이 되어 보니, 자신이 혼례를 치를 수 있는 나이가 되는 그 ‘오륙 년’을 기다리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버텼을 아버지의 운명에 대한 공감과 연민의 마음이 울음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또 한편으로는 아들의 혼례만은 자신의 생전에 치러낸 데서 온 감격이었을까.
가는 해를 보내고 오는 해를 맞으며 인류가 있어온 이래로 면면히 이어져 온 부자(父子)의 운명에 대해 생각해 본다.
글쓴이강만문(姜萬文)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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