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고전의 향기

이성 통혼 (異姓 通婚)

백광욱 2023. 5. 2. 00:02

 

이성 통혼 (異姓 通婚)

 

< 번역문 >

자네가 편지로 보여 준 일에 대해서는, 주자(朱子)의 가르침 중 내외종(內外從) 남매끼리 부부가 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의리를 가지고 말하자면 이성(異姓)의 근족(近族)은 의당 결혼이 불가한 것이 없으나 다만 우리나라는 중국(中國)과 똑같지 않아서 국속(國俗)이 외가(外家)를 중요하게 여긴다네. 게다가 신랑감의 외가 쪽 칠촌은 형제의 항렬이 아니니, 신랑감의 모친 입장을 가지고 말하자면 오촌 당숙(堂叔)과 사돈이 되는 것으로, 이는 온당하지 못할 듯하네. 세상 사람들이 육촌을 사돈으로 삼는 것은 풍속이 돼버린 지가 이미 오래되었지만, 오촌끼리 사돈이 된다는 것은 아직 들어보지 못하였다네. 그래서 가벼이 의논할 수 없으니, 예(禮)를 잘 아는 이에게 다시 물어서 처리하라는 뜻으로 그 집안에다 말해 주어야 할 것일세.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예(禮)는 예와 지금에 따라서 마땅한 바가 각기 다르므로 나의 견해가 이러할 뿐이라네..

 

< 원문 >

示事, 以朱子所訓內外從娚妹當爲夫婦之義言之, 異姓近族, 宜無不可結婚, 而但我東與中國不同, 國俗以外家爲重. 且郞材之外七寸非兄弟行, 以郞材之母親而言, 則與五寸堂叔爲査, 恐似未安. 世人之以六寸爲査, 成俗已久而五寸爲査, 則蓋未之聞也. 不可輕議, 須以更問於知禮者而處之之意, 告于其家如何? 禮有古今異宜, 故愚見如此耳.

- 박윤원(朴胤源, 1734~1799), 『근재집(近齋集)』14권 「답김흥지(答金興之)」

 

유가의 예법에서 규정한 혼인 가능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통상 주(周)나라의 예법에 따라, 동성(同姓)일 경우는 ‘아무리 백대(百代)가 지나더라도 혼인하지 않는다[雖百世而昏姻不通]’는 ‘동성불혼(同姓不婚)’이 대원칙이 된다. 주지하다시피 유가적 예법이 자리를 잡기 전인 신라(新羅)와 고려(高麗)에서는 동성끼리 혼인하였는데, 조선이 건국한 뒤 동성끼리 혼인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였고, 급기야 현종(顯宗) 10년(1669) 1월에는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주청에 따라 ‘동성이관(同姓異貫)’끼리의 혼인까지 금지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성(異姓) 친인(親姻) 간의 혼인’이었다.

 

   이와 관련된 대표적 사례가 바로 17세기 조선의 ‘윤주교(尹周敎)의 혼사(婚事)’이다. 윤주교는 윤단(尹摶, 1628∼1675)의 아들로 우암의 외손자이다. 우암은 윤주교를 유상기(兪相基, 1651~1718)의 딸에게 장가보내려고 하였는데, 유상기는 우암의 종형(從兄) 송시염(宋時琰)의 손녀사위가 된다. 혼인 당사자인 윤주교와 유상기의 딸은 ‘파평 윤씨(坡平尹氏)’와 ‘기계 유씨(杞溪俞氏)’로 이성(異姓)이지만, 외가가 되는 송씨 집안을 기준으로 삼아 촌수를 따져 보자면, 구촌, 즉, 삼종 숙질간이 된다. 이 혼사가 추진되자 윤주교의 오촌 당숙인 명재(明齋) 윤증(尹拯, 1629~1714)은 이를 극력 저지하였다. 물론 여기에는 명재와 우암의 깊은 갈등과 앙금도 없지는 않았지만, 혼인의 당사자들끼리 서로 외가 쪽으로 연결된 친인이 되기 때문에 문제시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우암은 주자 집안의 혼사를 거론하며 논박하였다. 일찍이 주자는, 예법상 동성끼리 혼인은 불가하지만 이성끼리 혼인은 가능하다고 하여서 외손자 황노(黃輅) –면재(勉齋) 황간(黃榦)의 아들- 를 친손녀 –주숙(朱塾)의 딸- 에게 장가보냈다고 한다. 쉽게 말해 내외종 간에 혼인한 셈이다. 우암의 논리는, 주자가 이러한 혼사를 행하였기 때문에 내외종 간보다 훨씬 더 촌수가 먼 이성 구촌 간의 혼사는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명재 쪽에서는 우암을 공박하며 ‘주자의 이 혼사만큼은 본받아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하였는데, 우암은 더욱더 강경하게 ‘당시 주자를 존경할 줄 알았던 북방의 오랑캐만도 못하다.’라고 응수하며 배척하였고, 혼사는 결국 이루어졌다.

 

   근재(近齋) 박윤원(朴胤源)이 살았던 18세기에도 ‘이성 친인 간의 혼인’은 여전히 논란거리였다. 위에서 인용한 편지는 근재가 매제 김재순(金在淳, 1733~?)의 양자 김시근(金蓍根, 1755~1825)에게 답한 것이다. 편지의 내용을 살펴보면, 어떤 이가 김시근에게 ‘이성 칠촌 간의 혼인’에 대하여 질문하였는데, 김시근이 다시 이 질문을 가지고 근재에게 물어보자, 근재가 답해 준 것이다.

 

   편지의 서두에서 언급한 ‘주자의 가르침’이란 바로 ‘이성 통혼’으로, 앞서 우암이 논박의 근거로 제시하였던 ‘주자 집안의 혼사’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그러나 남송 대 주자 집안의 혼사라든지 전인(前人)으로서 오롯이 주자를 따르고자 한 우암의 주장은 당대의 현실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 때문에 학문에 있어서 주자와 우암을 존신한 근재이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의 실정을 인정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다시 말해, 중국과는 다른, 우리나라 고유의 풍속이라고 할 수 있는 외가를 중시하는 문화를 현실로 받아들여서, 이성 친인 간에도 촌수와 항렬의 존비(尊卑)를 따져 보아 팔촌 미만이거나 항렬이 서로 맞지 않으면 혼인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바로 근재의 생각이다. 만약 질문의 내용처럼 남자가 외가 쪽 칠촌과 혼인한다면, 당시 이미 풍속으로 정착해 버린 ‘이성 팔촌 간부터의 혼인’도 아닐 뿐만 아니라 숙항(叔行)과 질항(姪行) 간에 혼인하여 존비가 어그러진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참고로 항렬의 존비를 기준으로 제시한 사람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었다. 퇴계는, 이성 칠촌은 ‘친족 간의 의리가 이미 다한 상태[族義已盡]’이므로 혼인은 가능하지만, 칠촌이나 구촌은 숙질간으로 존비가 다르기 때문에 혼인해서는 안 되며, 육촌이나 팔촌은 동항(同行)이므로 혼인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퇴계의 설(說)에 대해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1574~1656)은 “칠촌이면 친족 간의 의리가 다한 듯하나 일가에서 팔촌이 생겨나니, 어찌 통혼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윤서를 논하는 것도 부당하니, 퇴계 선생의 설은 따라서는 안 될 듯하네.[若七寸則族義似盡, 而一家生八寸, 何可通婚乎? 倫序亦不當論耳. 退溪先生說, 恐不可從也.]”라고 하며 반대 의견을 밝혔다.

 

   편지의 내용을 통해서 미루어 알 수 있는 사실은, 성리학을 국시로 삼았던 조선조에서도, 특히 근재의 당대에도 모계(母系), 즉, 외가 쪽을 중시한 풍습이 여전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이성 육촌끼리 사돈을 맺는 것, 바꿔 말하면 이성 팔촌 간부터 혼인하는 풍속은 상당히 오래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외가를 중시하는 우리나라 고유의 풍습을 ‘예법’의 범주 안에 넣어야 하는가는 또 다른 문제였다. 외가를 중시하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중화(中華)의 제도’가 아니라 ‘동국(東國)의 풍속’이었기 때문에 근재를 포함한 조선조 지식인들은 예법을 강구할 적마다 언제나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아울러 ‘이성 팔촌 간부터의 혼인’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입론(立論)의 근거와 관점이 달라 제설이 분분하다. 그중 이와 관련하여 대표적으로 참고할 만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주장을 소개하면서 글을 갈음할까 한다.

  

……동성끼리는 백대가 지나더라도 혼인해서는 안 되고, 이성끼리는 팔촌을 기준으로 제한을 두어서 아무리 서너 번 뒤바뀐 친족일지라도 팔촌의 범위 안에 해당하는 경우는 통혼할 수 없게 해야 하니, 이것이 의리에 맞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사대부라면 모두 「팔고조도」를 그려서 뿌리를 찾는데, 여기서 ‘팔고조’라는 것은 조부의 조부와 외조부, 조모의 조부와 외조부, 외조부의 조부와 외조부, 외조모의 조부와 외조부이다. 이 팔고조의 혈맥 안에 해당하는 자들끼리 서로 통혼하지 않는다면야 ‘혈연관계의 분별을 엄격하게 적용한다[厚別]’라고 이를 만할 것이다. -이성끼리는 구촌부터 서로 부부가 되더라도 예의(禮義)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凡同姓百世不婚, 凡異姓限以八寸, 雖三翻四易之親, 凡在八寸之內者, 不得通婚, 庶乎其合理也. 吾東之士ㆍ大夫, 皆作「八高祖圖」, 以究根本. 八高祖者, 祖父之祖父外祖父也. 祖母之祖父外祖父也. 外祖父之祖父外祖父也. 外祖母之祖父外祖父也. 凡同爲八高祖之血脈者, 不相通婚, 則斯可謂厚別矣. -自九寸以往, 與爲夫婦, 未害義也.-

 

글쓴이  :  이영준
성신여자대학교 고전연구소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