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찾아온 절호의 기회
“개막이 임박한 파리강화회의는 특히 약소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니, 대표를 파견하여 주장함이 좋을 것이다.”
1918년 12월 15일, 미국 대통령 윌슨(Wilson,T.W)이 중국 정부를 위해 상하이에 파견한 특사 클레인의 이 연설을 들었던 대한민국의 청년들 몇 명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전이 끝나고 세계의 새로운 질서가 확립되기 시작할 때, 우리나라도 독립을 기대하는 분위기로 한껏 고조 되었는데요. 여운형, 선우혁, 한진교, 장덕수, 김철, 조동호, 정인보, 서병호 등 6인의 발기로 1918년 8월 20일, 중국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신한청년당>이 창립 되었습니다.
(앞줄 오른쪽 끝 김규식, 왼쪽 끝 여운홍, 뒷줄 왼쪽에서 둘째 이관용, 셋째 조소앙)
여러 청년들 가운데 중심인물이었던 여운형과 장덕수는 독립운동의 방법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토론에 토론을 거듭합니다. 이들은 우리 민족의 독립은 장기전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그 과정에서 청년의 독립운동이 중요할 것이라는 의견에 발기인 모두 동의하였습니다. 이들은 매주 토요일에 모여 토론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당의 이름인 <신한청년당>은 여운형이 같은 외국인 유학생 아멜 베이(터키 청년당원)과 그의 친구들로부터 ‘청년투르트당’의 대한 이야기를 듣고 참고하여 만든 이름이었습니다. 신한청년당은 이 기회에 한국의 독립을 달성해야 한다는 의지로 장문의 글을 작성하였습니다. 그리고 강화회의에 전달해 달라는 주문과 함께 한국 대표도 참석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으나 답변을 받지는 못하였지요.
그러나 그들은 조직을 탄탄하게 만들기 위해 부서와 인선을 정하였고 이때 백범 김구 선생이 여운형, 이광수, 안정근, 장덕수, 선우혁 등과 함께 이사로 추대 되었으며 회원이 150명 정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기관지 ≪신한청년≫을 발간하여 독립 정신을 고취하였고, 외교에 능한 김규식을 파리 강화 회의에 민족 대표로 보냈습니다. 덕수는 일본에서 2·8독립선언을 촉진시켰고, 국내로 들어온 선우혁은 관서 지방의 기독교인과 손을 잡은 뒤 3·1운동을 일으키도록 분위기를 조성해 주는 아주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그 뒤 30여 명의 신한청년단 핵심 단원들은 1919년 4월 초 1,000여 명의 동포를 배경으로 프랑스 조계의 바오창로(寶昌路) 329호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였고, 이것이대한민국임시정부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신한청년당>이 창립되고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이룩한 결과들이었습니다. 길고 긴 독립운동의 시작은 그렇게 시작했던 것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께서 ‘나의 소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그들이 ‘신한청년’을 발간하여 우리 민족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어쩌면 독립 이후, 우리가 우리를 지키는 그 강력한 힘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역사의 흐름 속에 너무 빨리, 큰 어른이 되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맹렬이 전진했던 <신한청년당>의 그 청년들을 잊어선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나라에서 우리는, 우리를 포기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랍니다. 조금 더 서로를 돌보아 주고 사랑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 출처 : 행복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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