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아뢰기를, (중략) “태천(泰川)의 유학(幼學) 선우욱(鮮于郁)의 원정에 ‘저는 기자(箕子)의 종손(宗孫)입니다. 숭인전(崇仁殿)의 전감(殿監)은 종손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간혹 지손(支孫)을 차출해 제수하기도 하여 여러 대 전해 온 조정의 급복(給復)이 장차 지손에게 돌아가 거의 종통(宗統)을 빼앗길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였습니다. 이는 비록 외람된 일이지만, 기자의 후손에 관계되는 사안이니 사건사(四件事)가 아니라고 해서 내버려 두고 논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번독스럽게 한 죄는 율문을 상고하여 감처하고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사실을 상세히 조사하여 공정하게 판결한 뒤에 장계로 보고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또 아뢰기를, “평양(平壤)의 유학 선우규(鮮于楏)의 원정에 ‘저의 5대조 선우위(鮮于瑋)로부터 조부 선우옥(鮮于鈺)에 이르기까지 숭인전 감을 세습해 왔습니다. 그리하여 저의 조부가 세상을 떠난 뒤, 도신이 저의 아버지 선우술(鮮于(氵+術))이 3년상을 마치기를 기다려 장차 이어받도록 하겠다는 것과 제 아버지의 삼종형 선우원(鮮于源)을 전례대로 가감(假監)에 임명하겠다는 일로 모두 계문(啓聞)하였습니다. 그런데 재작년 태천에 거주하는 족인(族人) 선우욱이 자신을 기자의 장파(長派)라 칭하며 전감 자리를 빼앗으려 하였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이 일을 전(前) 도백(道伯)에게 호소하였으나 형벌을 받고 결국 습직(襲職)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속히 담당 관사에 명하여 명백히 조사하여 공정하게 처결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상께서 재결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전교하기를, “본도로 하여금 내게 물어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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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는 기자(箕子)를 모시는 사당인 숭인전(崇仁殿)이 있다. 숭인전의 전신은 고려 시대에 세워진 기자사(箕子祠)이다. 고려 숙종 때 정당문학(政堂文學) 정문(鄭文)의 건의로 인해 기자의 무덤을 찾아 사당을 세웠으며, 충숙왕(忠肅王) 때 기자사를 건립하여 그에 대한 제사를 본격적으로 지내게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변계량(卞季良)으로 하여금 기자 사당에 대한 비명(碑銘)을 지어 세우도록 하고, 평안도 관찰사에게 참봉을 선출해 이곳을 지키도록 하는 등 기자에 대한 예우를 더욱 두터이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1611년(광해3) 기자의 후손을 별도로 세워 사당 제사를 주관하도록 해 달라는 평양 지역 인사들의 청원에 따라, 이듬해 기자사의 명칭을 ‘숭인전’으로 고치고 기자 후손 중 한 명을 정6품 지위의 전감(殿監)으로 삼아 이를 대대로 지키도록 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이에 평안도 태천(泰川) 사람 선우식(鮮于寔)이 초대 숭인전 감으로 임명되어 기자의 후손으로서 그 직임을 세습하게 되었다. 기실 당시까지만 해도 한씨(韓氏), 공씨(孔氏), 인씨(印氏) 등 기자의 후예로 일컬어지는 가문이 여럿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선우씨(鮮于氏)가 제사를 받들 후손으로 특별히 지목된 것이다.
선우씨가 기자의 후손으로 선정된 이유는 당시 평안도 유생 정민(鄭旻) 등이 올린 상소에서 살펴볼 수 있다. 상소에 따르면, 사서(史書)에 마한(馬韓) 말엽 기자의 후손인 양(諒)이 평안도 용강(龍岡) 오석산(烏石山)에 들어가 선우씨(鮮于氏)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운부군옥(韻府群玉)』과 『강목(綱目)』에 기자의 지자(支子)인 중(仲)이 ‘우(于)’ 땅을 식읍으로 받아 선우를 성씨로 삼게 된 일이 실려 있다고 한다. 또한 조맹부(趙孟頫)가 선우추(鮮于樞)에게 준 시에도 ‘기자의 후손에 구레나룻 좋은 노인 많아라.[箕子之後髥翁多]’라 한 대목이 등장한다고 한다. 이러한 근거를 바탕으로 평안도 유생들은 선우씨가 기자의 후손임이 틀림없다고 주장하였고, 이는 조정의 심의와 평안도의 조사를 거친 끝에 결국 사실로 받아들여졌다.(이정귀(李廷龜), 「기자묘비명(箕子廟碑銘)」 / 차천로(車天輅), 「숭인전비(崇仁殿碑)」) 17세기 초에 이르러 선우씨가 처음으로 기자 후손으로서 공식적인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조정의 결정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존재하였다. 대표적으로 김시양(金時讓)은 “선우씨를 기자의 후손이라고 한 것은 소동파(蘇東坡)가 선우신(鮮于侁)에게 지어 준 시와 조맹부가 쓴 「선우추서서(鮮于樞書序)」에 기자의 후예라고 한 말에서 취한 듯하나 또한 근거가 미약하다. …… 기자전을 숭인전이라 하고 선우씨를 전감으로 삼은 것은 모두 광해조의 혼란한 정치가 서로 이끌어 거짓된 일을 행한 결과이다. 인조반정 초기에 즉각 혁파하고 조종의 옛법을 회복하는 것이 마땅하였을 것인데 지금까지 그대로 따르고 있으니, 실로 탄식할 만한 일이다.”라 하여, 선우씨를 기자의 후손으로 공인한 조치가 적절치 못하였다는 견해를 피력하기도 하였다.(김시양,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이처럼 진위 여부 및 적절성을 둘러싼 논란이 일부 존재하기도 하였지만, ‘기자 후손’으로서 지니는 선우씨의 지위와 역할은 광해조 이래 조선 후기까지 공고하게 이어졌다. 선우씨들이 이후 숭인전 감을 대대로 계승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은 다양한 문헌 기록에서 언제나 ‘기자의 후예’라는 이름으로 특기(特記)되며 조선인들의 후한 예우를 받았다. 숭인전 개칭과 함께 기자 후손으로서 국가적인 공인을 받은 선우씨는, 이제 조선 사회에서 그만의 남다른 위상을 점유한 가문이 되었다.
그렇지만 이와 같이 높아진 사회적 위상은 때로 집안 간의 다툼을 불러일으키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1807년(순조7) 평안도 태천에 거주하던 선우욱(鮮于郁)이, 격쟁(擊錚)을 통해 현재 다른 지손(支孫)이 세습하고 있는 숭인전 감의 직책을 종손인 자신에게 돌려달라고 호소한 것이다. 선우욱이 올린 이러한 청은 도신(道臣)의 조사를 거친 끝에 근거가 있다고 판단되어 그에게 숭인전 감 자리가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2년 뒤인 1809년(순조9), 이번에는 선우욱에게 전감의 지위를 빼앗긴 선우규(鮮于楏) 집안에서 격쟁하여 자신들이 이어받기로 되어 있던 직임을 본래대로 되찾아 계승할 수 있기를 청하였다. 숭인전 감을 둘러싸고 후손 간에 다툼이 지속되는 모습을 지켜본 조정에서는, 결국 초대 숭인전 감이었던 선우식의 직계 자손 가운데 한 명을 다시 찾아 임명하여 그 지위를 승습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승정원일기』, 순조 9년 5월 7일)
『일성록』을 비롯한 문헌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이와 같은 사실들은, 조선에서 특별한 존재로 인식되었던 ‘기자’의 위상과 그로 인해 후예 선우씨들이 지니게 된 당대 사회에서의 변별적 지위를 아울러 살필 수 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