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도 저 봄풀처럼 다시 날 수 있다면
지난번엔 옆집 애와 놀았었는데
오늘은 옆집 애만 홀로 왔구나.
봄바람에 꽃다운 풀 고운 빛깔들
어느새 또 못가 누대 뒤덮었는데.
昔與隣兒戲 석여린아희
隣兒今獨來 린아금독래
東風芳草色 동풍방초색
忽復滿池臺 홀부만지대
- 홍세태(洪世泰, 1653~1725) 『유하집(柳下集)』 권2 「느꺼워져(有感)」
오늘 살펴볼 시는 유하(柳下) 홍세태(洪世泰, 1653~1725)의 「유감(有感)」이란 작품입니다. 유하(柳下) 홍세태(洪世泰, 1653~1725)는 본관이 남양(南陽), 자는 도장(道長)이며 호는 창랑(滄浪) 또는 유하(柳下)입니다. 중인 신분이었지만 타고난 시재(詩才)로 인해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 이병연(李秉淵) 등 백악시단의 명사들과 교유하면서 조선후기 한시 쇄신을 이끌었던 문인입니다. 미천한 신분 탓에 평생을 불우하게 살았지만 시 창작에 매진하여 걸출한 시적 성취를 이루었고, 여항인(閭巷人)들의 시 모음집인 『해동유주(海東遺珠)』를 편찬하여 조선후기 여항문학을 본격화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은 봄날 고운 풀이 파릇한 못가에 어린 아이가 나와 노니는 모습을 포착하고 있어 언뜻 보면 봄날 풍경을 읊은 시인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을 천천히 곱씹어 보면 시인의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을 만나게 됩니다.
시인의 시선은 지금 못가 누대에 있습니다. 그 못가는 봄바람이 다사롭고 신록 고운 풀들로 덮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못가에 이웃집 아이가 와 있습니다. 1구의 ‘석(昔)’, ‘여(與)’와 대비된 2구의 ‘금(今)’과 ‘독(獨)’은 행간에 눈물겨운 사연이 감추어져 있음을 암시합니다. 지난 날 함께 했던 동무는 누구고, 지금은 또 무슨 이유로 옆집 아이만 혼자 나왔을까요?
그렇습니다. 지난 날 옆집 아이와 함께 놀았던 동무는 바로 시인의 자식이고, 지금 옆집 아이 혼자서 못가에 나온 것은 함께 놀던 동무, 즉 시인의 자식이 이제는 함께 놀 수 없는 먼 하늘나라로 떠났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애써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오는 대목입니다. 옆집 아이를 보는 순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옆집 아이와 함께 놀던 ‘내 새끼’가 떠올랐을 것이고 그로 인해 내 아이의 부재가 실체적 경험으로 처절하게 확인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홍세태는 참으로 슬픈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생애는 8남 2녀나 되는 자식들을 모두 자기보다 앞세운 가혹한 삶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그렇게 세상을 떠난 아이-몇 번째 자식인지 분명하지 않지만-를 떠올리며 피눈물로 쓴 시입니다. 그런데도 이 작품은 어디에도 눈물, 혹은 슬픔을 드러내는 표현이 없습니다. 오히려 절절한 슬픔 대신 시인의 눈에 들어온, 봄날 혼자 나와 놀고 있는 옆집 아이만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을 뿐입니다. 시인이 느꼈을 비통함과 너무나도 담담한 시적 진술이 만들어내는 괴리, 바로 이 괴리 앞에서 우리는 시인의 처절한 눈물을 읽게 됩니다.
그런데 홍세태의 문집에는 이 작품의 바로 앞에 아이가 죽고 나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슬픔을 절절히 읊은 작품이 있어 같은 주제를 형상화하는 서로 다른 방식을 이해하는 데 좋은 참조가 됩니다. 「슬픔(述哀)」이라는 작품입니다.
나는 궁액(窮阨)에 빠진 뒤로
생의 흥취는 말라 죽은 나무 같았지만
그래도 네가 있어 입을 열었고
늘 서글픈 마음을 위로 받았다.
아! 네가 떠나간 지금
나의 하루하루는 더욱 고독해져
집에 들면 어디선가 네 목소리 들리는 듯
문 나서면 어딘가 있을 것만 같은 너를 찾게 된다.
무엇을 마주해도 늘 뽑혀 나오는 네 생각
마치 뱃속 가득 채워진 고치실 같은데
서글퍼라! 저 한 줌의 흙으로
네 넋과 뼈를 산발치에 묻었구나.
평생에 나를 멀리 떠난 적 없었는데
오늘 밤은 누구랑 함께 자느냐?
부질없이 절필(絶筆)의 글 남겼는데
예쁜 네 얼굴이며 눈동자가 아른거리네.
상자를 열어도 차마 볼 수가 없어
다만 눈물만 줄줄 흘릴 뿐이지만
까마득한 저 구원(九原)의 아래에서
네 어찌 내 곡소리 들을 수 있으랴!
自我罹窮阨 生趣若枯木 賴爾得開口 聊以慰心曲
嗟汝今已矣 令我日幽獨 入室如有聞 出門如有矚
觸物每抽思 如繭絲在腹 哀彼一抔土 魂骨寄山足
平生不我遠 今夜與誰宿 空留絶筆書 婉孌當面目
開箱不忍視 但有淚相續 冥漠九原下 爾豈聞我哭
자신의 삶은 궁핍해서 말라죽은 나무처럼 살 뜻이 없었지만, 그래도 아이가 있어서 입을 열었고 서글픈 마음을 위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 아이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릴없이 자식을 한 줌 차디찬 흙 속에 묻고 돌아왔지만 시인의 마음은 자식을 그냥 그렇게 떠나보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어디선가 도란도란 그 아이의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문을 열고 나가면 그 아이가 골목 어디선가 아이들과 뛰어놀고 있을 것만 같다’고 하였습니다. 무엇을 보든 죽은 자식에 대한 생각이 마치 누에 뱃속의 고치실처럼 끊이질 않습니다. 아이를 묻고 오던 날 밤, 시인은 “평생에 나를 멀리 떠난 적 없었는데, 오늘 밤은 누구랑 함께 자니?”하며 피눈물을 쏟습니다. 이 작품은 자식을 묻고 온 뒤 절로 터져 나오는 슬픔을 시를 쓴다는 의식 없이 터져 나오는 대로 쓴 시입니다. 그렇기에 그 절절한 슬픔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슬픔에 대한 서로 다른 형상화를 하고 있어 이 두 작품을 함께 읽어보면, 「유감(有感)」이란 작품에 감추어진 슬픔이 어떤 것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작품은 「슬픔(述哀)」에서 처럼 자식을 잃은 슬픔을 장편의 시로 절절하게 토해내지 않지만, 행간에 서린 슬픔은 한층 배가 되어 울려납니다. “문을 나서면 어딘가 있을 것만 같은 너를 찾게 된다”고 했던 그대로, 시인의 눈은 ‘어딘가 있을 것만 같은 너’를 찾다가 못가에 홀로 나온 옆집 아이에 이르렀습니다. 그 때, 시인의 눈길이 혼자서 놀러 나온 옆집 아이에 머물렀을 때, 시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봄바람 불자 전처럼 또 못가를 덮은 고운 봄풀을 보면서, ‘내 새끼도 저 봄풀처럼 다시 날 수 있으면’ 하고 사무치게 그리워하지는 않았을까요? 이렇듯 시인의 심정을 헤아리는 동안 독자는 시인의 슬픔에 공명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시인의 슬픔은 한층 더 깊은 슬픔으로 독자들에게 전달되게 됩니다. 다 말하지 않아도 더 잘 말하는 한시의 말하기 방식이 수준 높게 구현된 작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글쓴이 : 김형술
전주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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